김종숙 시인(화순) / 사물들
중심을 잃고 오래 누운 날은 사물들만 오래 곁을 지켰다 보행보조기와 전기침 시계와 달력 유리창의 먼지…… 모든 원형질의 뿌리는 절박함이다 이때 우리는 바랑을 지고 탁발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 않고서 어찌, 남겨진 배추김치 겉잎 한 장을 펼쳐 나무 그늘이라 찾아들고 병실로 포행 온 해 그림자에서 물결을 만날 것이며 병상의 누워 태백의 황지연못을 돌고 돌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달력에 걸린 풍경 속을 걸어 들어 내가 풍경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수 천 가닥의 침이 내리 꽂히는 날 백담계곡 영실천 무극의 천탑을 내게 왔다 갔더란 말인가
지독한 바람 앞에서는 사물들도 마음을 보태 현(玄)의 시간을 같이 건너주더라
김종숙 시인(화순) / 민주의 나무 -미얀마 응원 릴레이 연대시 21
제주 아끈다랑쉬 오름에 나홀로 나무 한 그루 있지 사철 홀로 푸른 나무, 그러나 너는 외롭지 않다 바람에 맞서 세 손가락으로 너를 수호하는 억새들의 부드러운 손과 단단한 뿌리가 너를 지킨다 민주주의 민주주의 데모크라시 데모크라시를 외치며 촛불을 치켜든 미얀마 미얀마가 너를 지킨다
햇살은 투명했으나 계엄군의 곤봉과 총탄은 시민에게로 향했다 태아도 어른 아이도 없이 모두 핏빛으로 낙하해 갔다, 오월이었다. 친구여, 우리 그대 위해 안민가를 합창하리니 피 흘려 지킨 민주의 나무 광주에서 양곤까지 밀고 나아가리니 울지 마오, 미얀마, 그대 위해 노래하리니
저기 떠도는 구름을 보오, 민주의 딸 민주의 아들들이 앞서 가며 새긴 말 다 잘 될 거야 Everything Will be OK 민주의 나무 향해 돌진하는 톱날을 막아서며 우리는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처럼 신념의 나무를 심는 그대여 흰 장미의 은유를, 촛불 하나의 힘을 믿어요
피로 역사를 세우려는 마성을 단호히 거부하는 그대여, 피의 냄새를 흠향하는 자의 침묵을 기억해요 악마는 심장을 꽃 뒤에 숨겨놓는다는 것을 기억해요 끝내 저 정치꾼들의 도구는 되지 말아요
환한 아픔 위에 봄을 써가요
김종숙 시인(화순) / 밥 한 그릇
이른 아침에 나가 늦은 밤 돌아오는 수험생 아들을 일러 아버지는 저 아이 나이가 몇이냐 물으신다 열여덟이라 이르니 내 저 아이만 할 적에 집안 오촌을 따라 경상도 영천 어디 로 허드렛일을 갔었니라, 땅이 꽝꽝 언 디서 다리공사 심부 름을 했거든 그 시절이야 집에서 밥 한 그릇 축내지 않으믄 그것이 수입이었제…… 내 몫아치 해내니라 용을 썼니라 예나 지금이나 제 몫아치 해야 밥 한 그릇 오지 않더냐
아홉 식구, 주발 위에 핀 이팝꽃 한 숭어리가 이렇게 왔더라
-시집 『동백꽃 편지』 중에서
김종숙 시인(화순) / 낙화유수
해마다 꽃피우던 수수꽃다리 반 토막으로 잘려나가 풀숲에 우두커니 서 있네 무성하게 새잎 내고 아침저녁 풋풋한 향내를 내던 것이 속수무책 심장이 도륙 당해 더는 바라볼 수 없구나 4월 봄꽃 같은 청춘들 잃고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구나 누구, 저 서늘한 자리에 적토를 바르고 어서, 풀 이끼라도 얹어 다오
- 2014년 <경남작가> 25호
김종숙 시인(화순) / 귀향
목민관 해관 행장은 부임시 행장 규모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던 다산을 생각하며 내 초록의 찻물 우려낸 낡은 다관 싸들고 집으로 가네
선생도 귀장(歸裝)을 꾸려 집으로 가는 길이 실금만 무수한 낡은 다관을 그러잡는 일 같았을까
이제껏 쓰였으니 그것이면 족하지
예속의 옷을 벗고, 벗어둔 나를 주어 입으러 집으로 가네
집으로 가는 길은 청운도 적운도 다 품어 빨래하기 좋은 날 당목 홑청 뜯어들고 간짓대 드리워 팔랑팔랑 말리려네
김종숙 시인(화순) / 정가
조곤이 와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세상 여자들의 귀를 혼곤하게 적시는 ‘너는 내 여자’라는 말, 초동(初冬)에 나무 한 가지를 흔들어 영원(永遠)밖에 모르는 그녀, 처마가 깊어져 그늘을 가졌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 가도록 태어났다는 사내,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라는 사내의 바람 같은 바구지꽃, 그녀의 사랑이 머물다간 자리
오래 비어 고요한 끝
김종숙 시인(화순) / 안연(顔淵)과 자하(子夏)
수곽으로 물 흘러드는 소리를 듣네 소리는 소리를 부르고 다시 또랑한 소리는 새로운 소리를 불러 소리는 물음이 되고 물음은 음계 없는 성 긴 질문이어서 물음은 물음을 낳고 다시 물음은 새로운 물음을 낳아 거기, 귀가 순해지기를 기다리는 늦깎이 여학생도 귀에 들어오는 질문과 물음을 받아 적느라 산그늘이 지는 줄 모르네
가만, 그 끝에 안연과 자하도 공자에게 묻고 답하네 공 선생이 제자들에게 새 물을 길어 붓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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