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화 시인 / 초경(初經)
검은 숲에서 북소리 들려온다 짐승의 정강이뼈를 들고 북치는 봉두난발 소녀가 나온다 벗겨 말린 털로 버찌 같은 젖꼭지 가리고 솜털 솟은 아랫 도리 숨겼다 소녀의 목에는 송곳니로 엮은 목걸이 걸려 있다 머리 위로 초생달이 떠 있다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매 한 마리, 설화 가득 핀 나뭇가지의 잔설(殘雪) 떨구며 날아오른다 멀리 별똥별이 밤공기를 세차게 가른다 소녀가 달을 꺾어 손에 쥔다 둥 두둥 붉은 달이 떠오른다 유년의 숲 속에선 사라진 달을 찾는 장작불이 타오른다 밤하늘을 숨죽이며 날고 있는 매가 머리 위에서 춤춘다 허공에서 휘이익, 한 바퀴 돌던 달이 날개를 펼친 매 대가리에 꽂힌다 깃털이 소녀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다 숲속 마을까지 비릿한 사냥꾼의 냄새가 술렁인다 허리춤에 사냥한 매를 단단히 꿰는 소녀, 매의 피가 소녀의 가랑이를 타고 흐른다.
윤진화 시인 / 손금을 풀다
당신이 이생에서 지금껏 연주한 가락이 들리거든요 손금도 악기 같아서 대금, 중금, 소금처럼 가로 불지요 당신의 비가(悲歌)는 끝이 없군요 휘몰아치는 장단이 꽤 오래됐어요 협곡에서 불러오는 바람이 쉴 곳이 없어요 바람이 쉴 곳이 없으니 푸른 나뭇잎이 흔들리지 않아요 나뭇잎이 신명에 겨워야 휘파람새가 몰려오고, 사람이 오는데 당신에게선 사람이 보이지 않아요 죄다 죽은 영(靈)이에요 당신은 영가를 불러야 할 사람이에요 희노애락생로병사 길흉화복흥망성쇠, 모두 단조로 흘러요
당신을 위해서는 당신이 야단법석이어야 해요 당신이 웃으면 삼라만상이 웃고 당신이 울면 천지가 울어요 당신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려요 당신의 손금에 흐르는 음악의 꼬리를 풀어놓고 도망친다면 당신은 사랑을 잃을 거예요
손금쟁이가 내 손에서 흐르는 곡조를 짚다가 다시 곱게 접어 내게 주었어요 난 받아 든 가락이 흩어지지 않도록 주먹을 쥐었어요 백팔 번 맞춰 내 가슴을 때렸어요 굵게 생긴 손금 사이로 눈물이 스며들었어요, 주먹을 풀었어요 허공으로 풀어진 길 손안에 숨어 있는 이 길을 따라가면 거기 사랑이 있다고 내 손을 맞잡고 연주해 주세요 당신의 손금을 내게 들려주세요 두 손을 악보처럼 펼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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