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숙 시인(리움) / 대청마루
나무 대문 한쪽 살짝 밀면 삐거덕 소리 내며 문이 스르르 열린다 뽀얀 팔 안에 여름방학 책 옆에 끼고 동갑내기 아이 들어서며 태순아 하고 불렀다
아홉 살짜리 작고 보드라운 손으로 뒤뜰에서 딴 옥수수를 양은 냄비보다 열두 배나 더 큰 가마솥에 삶고 있던 태순이는 아궁이에 부짓갱이를 던져놓고 단숨에 달려 나와 어깨동무한 내 친구
디귿자로 뺑 둘러진 마루 건너면 낮에도 30촉짜리 전등을 켜야 얼굴이 희미하게 보이고 요강도 있고 다듬이도 있고 재봉틀도 있던 곳
길게 엎드려 두발을 깔딱깔딱 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문제가 막히면 전과도 꺼내놓고 수련장도 펴 놓고 답을 골라 베껴 쓰던 곳
재봉틀 네모 상자 안에는 우리 둘만의 비밀 주머니도 들어있었다
하얀 몽돌 다섯 개 모아둔 주머니를 꺼내어 다섯 알 구르는 공기놀이를 하다가 매번 허다 쳐 놓치기 일쑤인 왼손잡이 내게 한 번 더 하라는 찬스의 눈짓 찡긋! 나는 그 눈짓이 좋았다
마루 사이로 빠져나가지 않는 몽돌 다섯 개도 보리수 열매를 따서 소꿉놀이하던 작은 조개비도
초여름에 얇은 바람 소리가 지나가는 마루 아래에귀 기울이며 들었던 마루 향기도 우린 좋아했다
한겨울 넓고 둥근 우물에서 두레박 물을 퍼 올려 고사리 손으로 빨아 비뚤어 짠 걸레가 마루 끝에서 꽁꽁 얼어 말라 뻣뻣해진 걸레가 어른거린다
대청마루 아래 태순이가 신고 다니던 쓸쓸한 깜장 털신까지도....
김종숙 시인(리움) / 봄날의 시 -1
눈부시게 선명한 꽃잎이 끓어넘치는 오후 세시
꽃반지 포개놓은 손등에 노랑나비 꾸벅이고 연둣빛 철석이는 버들가지 사이로 마스크 두 개가 뽀뽀를 한다
이리 고운 빛이라면 숨겨놓고 닫아놓은 가슴 열어젖히고 절반의 빛깔은 꼭꼭 접어두리
이리 고운 날이라면
김종숙 시인(리움) / 친정 가요
밤새 초승달님은 대추나무 위로 다녀가셨나봐 이슬비 따라와 뭉쳐진 그리움 뽀독뽀독 씻겨내고 산허리에 구름 목도리 두르고 어디 가시나 저 큰 아씨는 가출하는 처녀처럼 굽은 어깨 들썩이고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은호 시인 / 상추 외 1편 (0) | 2022.09.02 |
---|---|
이용주 시인 / 사물의 그림자 외 1편 (0) | 2022.09.02 |
신원철 시인 / 각도백화점 주차장 앞에서 외 1편 (0) | 2022.09.01 |
이학성 시인 / 강박 외 1편 (0) | 2022.09.01 |
김진희 시인(시조) / 달빛 호수 외 4편 (0) | 2022.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