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성 시인 / 강박
무엇이건 만지려면 손을 씻어야 했다. 심지어는 펼쳐 놓은 책의 다음 쪽을 넘길 때도 그래야 했다. 그러지 않고선 책의 활자가 명료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헌 책이건 새 책이건 별반 다를 바 없다. 젖은 욕실수건을 갈아 대느라 여인은 간혹 타박했다. 왜 매순간 손을 닦아야 하죠, 물의 정화가 지나치게 심각해요. 그것 말고는 여인의 잔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고, 갑작스레 여인이 떠나가는 바람에 물을 만지고 있노라면 불쑥 어떤 생각이 떠오르곤 해, 하는 항변은 아직까지 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여인의 주검을 땅속 깊이 묻고 난 후 손을 씻는 버릇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대신 셔츠 맨 윗 단추까지 걸어 채우는 성가신 습관이 생겼다. 그러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바깥으로 떼기 어려웠으나 뜻밖의 소득처럼 가외의 발상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향후 이 버릇은 어떻게 떨어져 나갈까. 상상만으로도 누군가를 잃은 일은 끔찍할 뿐인데, 아직 또렷한 답은 홀연히 다가오지 못했다.
- 이학성 시집 '늙은 낙타의 일과' 에서
이학성 시인 / 채석장 기차
느리거나 빠르지 않게, 하루 두 차례 같은 길을 채석장 기차는 고아처럼 오르 락내리락했다. 대체 저 많은 돌덩어리들은 다 어디로 간담?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지만, 그 회색 기차를 보며 단지 염원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가 길을 잃지 않기를, 하지만 그것은 아주 먼 옛일, 덜컹거리던 차량도 녹슨 철길도 사라진 지 한참.
온통 마음이 백짓장 같던 어느 오후 기어이 몇 시간을 걸어 찾아갔을 때, 철길 끝 채석장 터에 웃자란 쐐기풀들만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길을 잃은 건가, 어딘가에 닿은 걸까. 지나왔던 길에서 마주친 몇 가지 망실은 확인하고서 도 이해되길 거부한다. 아니, 하루 두 차례 궤도처럼 덜컹거린다. 이른 저물녁 더 늦은 저물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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