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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종숙 시인(리움) / 대청마루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

김종숙 시인(리움) / 대청마루

 

 

나무 대문 한쪽 살짝 밀면 삐거덕 소리 내며 문이 스르르 열린다

뽀얀 팔 안에 여름방학 책 옆에 끼고

동갑내기 아이 들어서며 태순아 하고 불렀다

 

​아홉 살짜리 작고 보드라운 손으로 뒤뜰에서 딴 옥수수를 양은 냄비보다 열두 배나 더 큰 가마솥에 삶고 있던 태순이는 아궁이에 부짓갱이를 던져놓고 단숨에 달려 나와 어깨동무한 내 친구

 

디귿자로 뺑 둘러진 마루 건너면 낮에도 30촉짜리 전등을 켜야 얼굴이 희미하게 보이고 요강도 있고 다듬이도 있고 재봉틀도 있던 곳

 

길게 엎드려 두발을 깔딱깔딱 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문제가 막히면 전과도 꺼내놓고 수련장도 펴 놓고 답을 골라 베껴 쓰던 곳

 

재봉틀 네모 상자 안에는 우리 둘만의 비밀 주머니도 들어있었다

 

하얀 몽돌 다섯 개 모아둔 주머니를 꺼내어 다섯 알 구르는 공기놀이를 하다가 매번 허다 쳐 놓치기 일쑤인 왼손잡이 내게 한 번 더 하라는 찬스의 눈짓 찡긋! 나는 그 눈짓이 좋았다

 

마루 사이로 빠져나가지 않는 몽돌 다섯 개도 보리수 열매를 따서 소꿉놀이하던 작은 조개비도

 

초여름에 얇은 바람 소리가 지나가는 마루 아래에귀 기울이며 들었던 마루 향기도 우린 좋아했다

 

​한겨울 넓고 둥근 우물에서 두레박 물을 퍼 올려 고사리 손으로 빨아 비뚤어 짠 걸레가 마루 끝에서 꽁꽁 얼어 말라 뻣뻣해진 걸레가 어른거린다

 

대청마루 아래 태순이가 신고 다니던 쓸쓸한 깜장 털신까지도....

 

 


 

 

김종숙 시인(리움) / 봄날의 시 -1

 

 

눈부시게 선명한 꽃잎이

끓어넘치는 오후 세시

 

꽃반지 포개놓은 손등에

노랑나비 꾸벅이고

연둣빛 철석이는 버들가지 사이로

마스크 두 개가 뽀뽀를 한다

 

이리 고운 빛이라면

숨겨놓고 닫아놓은 가슴 열어젖히고

절반의 빛깔은 꼭꼭 접어두리

 

이리 고운 날이라면

 

 


 

 

김종숙 시인(리움) / 친정 가요

 

 

밤새 초승달님은 대추나무 위로 다녀가셨나봐

이슬비 따라와 뭉쳐진 그리움

뽀독뽀독 씻겨내고

산허리에 구름 목도리 두르고

어디 가시나 저 큰 아씨는

가출하는 처녀처럼

굽은 어깨 들썩이고

 

 


 

김종숙 시인(리움)

전북 부안 출생. 2020년 『문예 마을』 시 등단. 2020년 『한양 문학』 수필 등단. 『시야 시야 동인』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2022년 제3회 <월간시> 윤동주 신인상 당선. 『서울시인협회 』회원. 『강동 문인회 』회원. 공저 시집 『여백 01, 『여백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