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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춘석 시인 / 생각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5.

박춘석 시인 / 생각

 

 

 생각은 외진 곳에 거처를 마련하여 살았다 답답함과 아늑함이 함께 있는 곳 고독의 힘이 훌쩍 담을 넘고 또 넘도록 했다 고독은 생각의 유물론적인 자연이었다

 

 지하와 평면이 숨겨진 이면처럼 고요히 생각 옆에 앉아 있었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에 생각의 크기는 끝 간 데 없고 절반의 낮 절반의 밤만큼 어둡고 밝았다

 

 생각은 세계를 키우고 싶었다 세계 속에 사람이 산다면 사람을 키우고 싶었다 생각 속에 숲이 있다면 숲을 가꾸고 싶었다 생각 속에 강이 있다면 넓은 바다로 나가고 싶었다

 

 생각을 키운 음악이 있었다 사람이 녹음기를 들고 천둥치는 여름비를 뚫고 왔다 음악의 자장에 묶여 생각이 자라고 또 자랐다 어느 한 방향으로 휘어진 나뭇가지처럼 생각의 우주 한켠에 음악을 들여 놓았다

 

 어머니가 생각을 낳은 이래 생각을 키운 어머니는 왜 그토록 많은지

 

 생각에게만 있던 산과 강과 열매가 있어서 작고 어린 생각은 강을 따라 걷고 나무를 따라 열매를 키우며 자랐다

 

 음악은 바람이었다 생각을 흔들어서 휘날리게 하고 지하에서 뿌리 채 뽑아서 허공을 살게 했다

 

 죽은 화가가 왜 생각을 키워주었는지 죽은 철학자가 왜 길을 안내했는지 죽은 시인이 왜 노래를 불러서 시인을 불러냈는지 생각은 몰랐다

 

 고뇌였던 에너지가 생각에 내재된 신이었다

 

 생각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장미의 어린묘목이었을까 백합의 뿌리였을까 바다의 시원이었을까 겨울에 내재된 계절의 씨앗이었을까

 

 창고 안에 무수한 생각들이 죽어가고 살아오는 겨울 너머 봄,

덜 자란 생각들이 하얀 눈 속에서 그늘이 가득한 창고 안에서 꽃을 들고 걸어 나왔다 층층의 땅의 층위를 딛고 올라서고 있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3월호 발표​

 

 


 

박춘석 시인

경북 안동에서 출생. 2002년 《시안》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나는 누구십니까?』(시안, 2012)와 『나는 광장으로 모였다』(현대시학, 2016), 『장미의 은하』(현대시, 2021)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