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우 시인 / 말꼬리와 소년
우리 집 앞산은 하얀 말꼬리를 가진 산 비 오지 않은 날엔 그 긴 꼬리 엉덩이 사이에 감추고 비가 왔다 하면 엄청 높은 꽁무니에서 도랑 바닥까지 질질 끌며 휘둘러댔어 드러난 바닥 꼬리가 때릴 땐 그 소리 기수의 회초리 소리보다 더 아프게 들려왔어
비 오는 여름날 한참 동안 힐끔거리다 보면, 바닥 치는 꼬리 소리를 듣고 천녀들이 내려와 휘휘 그 말꼬리와 함께 요염하게 춤을 추다 공중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 어른거려 자꾸만 내 눈을 비벼보기도 했지
내 유년기의 발가벗은 목욕, 봇물에서 떨어지는 몽당 말꼬리에 여름을 식히곤 했지 봇물에서 새어 나온 그 짧은 꼬리 천녀가 거기까지 와 어린 소년을 유혹이라도 했는지 간지럽다 못해 어찌할 수 없는 달아오름을 느끼곤 했어
머리 길게 땋은 여자아이들, 등 뒤 머리카락 꼬리를 보면 비가 오다 햇살 퍼질 때 눈부시도록 춤을 춘 흰 눈 같은 천녀들을 보았고, 밤이 되면 그 사춘기 아이 꽤 긴 말꼬리 따라 뛰어내려 ‘이젠 내 몸 박살 나 죽는구나’ 하다 온몸 무게 바닥에 닿기 직전 화들짝 깨어나 버리는 꿈 자주 꾸곤 했지
이초우 시인 / 까르페 디엠*
도시는 온통 안개에 저려 방향감각을 잃고, 신선들이 안개 속을 날아간 고속도로
가파르게 오른 불쾌지수 우린 주먹 키스로 서로를 위로하고, 해안가를 돌고 돌아 '웨이브 온'**에 도달, 벽이 하얀 개미 동굴, 여기저기 여왕개미들 비스듬히 누워, 오! 바닷가 시트, 자연풍과 에어컨 바람이 왈츠를 추며 돌고 도는,
영상 강의로 집 안에서, 긴 장마철 창문이 일을 하지 않은 날들
아버지와 난 목마 위에 앉아 둥실둥실 파도타기를 하며 돌던, 그러나 우리들의 도시, 그렇게 기다렸지만 안개가 걷히질 않는
하필이면 해지는 오후, 디스코, 힙합, 망치 춤, 수컷 하루살이들의 군무 저쪽 발치에서 지켜보던 암컷, 쏜살같이 가로질러 유유히 날아오른, 미련 없이 마감한 멸(滅)의 향연
바다는 언제 봐도 깊은 내륙에서 온 나그네의 몫 첨벙대는 갯물 위에 노동을 한 아버지 어둠이 수면 삼키려 들면 아버지의 허약한 췌장 흐물흐물해졌겠지
나는 그와 헤어지고 꽤 먼 해안가 '文化酒所'***로, 펜트하우스 모서리 달로 착각 석양을 붙잡고, 옷깃만 미어질 뿐 네 어찌 승자가 될 수 있겠나 "메시아"를 관람하고 눈물로 작곡한 '천지 창조' 호랑이와 사자 으릉, 으흥, 포릇 포르릇 종달새의 날갯짓 소리로 그려진 고전주의 너와 난, 불협화음이 사라진 제6일의 피조물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오늘을 즐기라’ 말한 핵심 경구,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원뜻의 라틴어. ** 부산 기장의 해안가 유명 카페. *** 부산 송도 소재, 인문학 갤러리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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