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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나비 시인 / 꿈의 규칙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1.

김나비 시인 / 꿈의 규칙

 

 

뇌에서 자라나는

묵음의 혀 불러내

어제의 문을 열고 내일을 더듬을 때

깊은 잠 태엽을 풀고 규칙을 통과한다

 

입구엔

누워서도 걸어가는 문이 있다

꿈이란 버석한 흙 또는 나뭇등걸

세상의 모두 이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

 

규칙 없는 규칙으로

꿈길은 흘러간다

우주의 암흑을 지나

백 년 후 꽃 피우고

침대맡 구름을 띄워 아침 해를 데려온다

 

시공을 푸는 열쇠는 알람 소리뿐일까

미래와 과거 현실 뒤섞인 마블링

사는 건 꿈에서 보낸 뜯지 않은

꽃 편지

 

 


 

 

김나비 시인 / 시시詩詩한 새벽

 

 

그대가 다녀간 행간 아픈 싹이 돋는다

비 오는 내 눈 속에 거미가 내려온 걸까

공막 속 핏발선 줄에 빗방울이 걸려 있다

 

명치에 쌓이는 빗소리를 닦아 내며

그대를 불러내어 종이에 가둔다

초침은 째깍거리며 어둔 밤을 가위질한다

 

썩지 않는 기다림은 끝날 수 있을까

비의 창살을 뚫고 날아가는 당신 모습

도시의 엉킨 발소리 밤을 넘어 행을 지운다

 

그대를 삼켜버린 길을 찾아 떠도는 슬픔

그대의 항아리에 피도 살도 다 풀어놓고

하얗게 녹아내린 채 흔적 없이 남고 싶다

 

 


 

 

김나비 시인 / 혼인 비행

 

 

차갑게 타는 불을 눈으로 매만질 때

네온사인 불빛들이 노점상 위로 떠다닌다

도시는 반딧불처럼 빛을 흔들어 밤을 깨운다

 

찬 빛에 가슴 데면 사랑이 깨어날까

심장이 새까맣게 타버린 혼인 비행

청년은 길에 쓰러져 죽음의 빛을 켠다

 

단속반에 내몰려서 입원한 응급실에

피 묻은 흰 붕대를 말없이 지키는 여자

조각난 눈빛 한 토막 화력이 단단하다

 

빛의 꼭지 자로 그으면 심박 그래프 춤을 출까

혼인이 끝난 숲에 그래프가 춤 멈추고

숨 놓은 밤의 손가락 가늘게 떨고 있다

 

 


 

김나비 시인

충북 청주 출생. (본명 김희숙). 청주대 국어국문학과와 우석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 2017년 《한국 NGO 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17년 《시문학》 등단. 201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수필집『내오랜 그녀』와『시간이 멈춘 그곳』. 시집 『혼인 비행 』(2020년), 『오목한 기억』. 2020년 안정복 문학상, 2021년 송순문학상 대상, 2021 사하모래톱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