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국 시인 / 기시감
심심한 시집에 끼워둔 책갈피는 언제고 슬레이트 친 기억의 편집 점입니다 먼지 낀 책장 끝자락에 꽂혔다 비나 내리면 철 지난 유행가처럼 코드가 맞아집니다 부슬거리면 떠오르는 불현듯 그 갑작스로움도 틈이 있어 메울 거리를 찾습니다 젓가락 장단이 골목을 채우는 대폿집에서 대책은 버스로 떠났고 즈음은 여행으로 막걸리와 동행합니다 썩 맛있었던 기억도 아끼던 애인과의 추억도 없는 주소지가 여행길 어디였다면 나는 어딘지만 알뿐, 한 번도 목적지를 걷지 못한 이정표일지 모릅니다 내린 적 있는 정류장 근처 마음을 떠돌다 빌딩들 사이 낀 열쇠집 거기서 조용히 당신을 기다린다고
서형국 시인 / 눈
어둑한 방파제 남녀가 뒤엉켜 있다
한쪽이 머리채를 휘어잡고 한쪽은 손톱으로 목을 후벼 파면서
벌을 받고 있다
인간이 지를 수 있는 극한의 발성을 쥐어짜 내며 사랑하는 사람의 마란 알아듣지 못하는
벌
거절할 수 있었는데 보여주고 싶었구나
누구에게?
불공평한 형벌에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사소함으로 그들은 뉘우치고 있겠지
신도 벌을 받고 있구나
귀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소리는 눈을 덮지 않았을 텐데
사력을 다해 침묵하는 꽃의 설욕에 긴 속눈썹이 자랐을 텐데
나는 벌을 받고 있구나
말을 하고 싶은데 눈을 떴으므로 귀를 덮고
텅 빈 첫 장에 세상에 없는 手話를 새겨야 하다니
거절하지 않는 것으로 면지의 배후를
증명해야 하다니
서형국 시인 / 태허(太虛)*
전지전능을 오래 거머쥔 것들은 간사하기가 인간 같아 새가 누리던 바람에도 압류를 고지했다
완장의 각질로 부유하다가 가라앉은 새
새니까 새쯤이니까
숲으로 날아든 비보엔 얼어 죽은 전서구 위로 서리가 내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누르고 눌러 서리가 온몸을 얼려 서리를 막아설 때까지 죽어 더 죽어 보라고
어느 날 서리는 슬픔을 알겠다는 듯 새를 잃고 자살한 나무에 목을 달아맸다
이렇게는 아닙니다 외쳐도 무언가는 부정해야 하므로 두려운 이들은 스스로 입을 지웠다
신이 되어 보지 못한 종족들만 말을 뺏기지 않았다
새끼를 어미의 품으로 인도하는 길에게 신을 쥐여 준 적 있다 서리가 개처럼 키우던 아침에게 신이라 명명했을 때처럼 마치 내가 그들의 세상에 존재했던 것처럼
소문이 구름같이 거짓말로 쓰일 때 처음으로 당신은 진실입니까 묻는 신을 만났다
나는 가장 느린 가차라 대답하고 틀렸다 라는 정답으로 남아야 했다 * 우주의 본체 또는 기(氣)의 본체.
ㅡ공저 『시골시인-K』(걷는사람, 2021)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은진 시인 / 포춘 텔러 외 1편 (0) | 2022.09.21 |
---|---|
김나비 시인 / 꿈의 규칙 외 2편 (0) | 2022.09.21 |
나종훈 시인 / 휴거 (0) | 2022.09.21 |
김기형 시인 / 아이가 뛴다 (0) | 2022.09.20 |
이초우 시인 / 말꼬리와 소년 외 1편 (0) | 2022.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