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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은진 시인 / 포춘 텔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1.

강은진 시인 / 포춘 텔러

 

 

누가 나에게 천사라고 했는데

나는 그걸 전사로 읽었다

 

막 싸우려 나가려던 참이었던가

 

여행지에서 보았던 천사는 거대했고

눈동자가 없었으며

긴 칼을 높이 들고 있었다

 

전사와 같은 천사와

천사 같은 전사는

한쪽은 죽이고

한쪽은 죽는 편

 

천사와 전사 사이

오독과 오타 사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둔다

 

그건 세상에 악수들이 있는 이유이자

점술가가 운명을 말해주는 방식

 

당신은 작은 불

차갑고 캄캄한 곳에서 홀로 타는 불

 

손이 늘 뜨거운 데에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더라면

차갑고 캄캄한 것들을 양손에 움켜쥐고

촛농처럼 막무가내로 녹아버렸을 거야

 

천사도 전사도 싸우도록 태어났으니

뭐하고든 싸워야만 하고

오독과 오타는 발생적으로 같은 것일지라도

 

왜 모든 차에 우유를 섞어 마시는지

왜 지나온 자리마다 타버린 자국들인지

생각 속에 갇혔던 마음이 조금 떠오른다

 

기도를 칼처럼 휘두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도 있다

 

- 월간 《현대시》 2021년 11월호

 

 


 

 

강은진 시인 / 어느 종말론자의 드레스 코드

 

 

유령처럼 조용한 우연이었으면 해

 

막다른 구석에서 동요하는 짐승의 눈동자에

우리가 없는 그날들이 각인되었다

 

칼날처럼 깊게 파인 검은 브이넥을 좋아해

심연을 향해 질주하는 꼭짓점의 날카로움을

그 통증과 차가움을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잊지 않기 위해

죽은 사람이 나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

날마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꿈을 꾸었는데

 

바닥이 없는 곳에서 끝없이 밑으로 가라앉으며

누군가 부르면

대답 대신 목을 내밀기로 했다

 

완벽히 검은 고양이는 완벽히 검은 밤에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어둠 속의 무지개를 응시한다

 

볼 수 있다는 믿음보다

이미 보았다는 착각 같은 것이

우리의 끝을 결정한다면

비로소 그 밤의 고양이처럼 완벽한 검정을 갖게 될까

 

걸을 때마다 긴 치마가 발에 밟혀 키가 점점 작아졌다

이 슬픔이 너무 지긋지긋해

이제 하이힐 따위 신지 않기로 했다

 

-시집『달콤 중독』 중에서

 

 


 

강은진 시인

1973년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석사 수료.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달콤 중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