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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재남 시인 / 그늘의 우화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5.

강재남 시인 / 그늘의 우화

 

 

 그러므로 그늘에 감염된 당신은 춥고 어두운 곳에서 만난 오늘의 설정입니다 그늘은 그늘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제 몸을 늘일 때 그 속에 숨은 그림자는 숨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에게서 빛을 다 내보낼 때 비로소 그늘은 제가 딛고 선 땅의 깊이를 알아챌 것입니다 그리하여도 이 빛나는 풍경에서 그늘은 제 속 어디에 그림자가 터질지 무심할 것입니다 하지만 잎이 무성한 길목이나 깊은 여름으로 가는 끝에서 당신은 잠시 다른 오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다른 오늘에서는 양떼와 목동이 지나고 광대와 소년이 지날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공손하고 당신에게 불평할 것입니다 양떼를 몰고 서쪽으로 가는 목동은 소년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북쪽을 향해 동그랗게 이마를 가리면 양떼를 버릴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그늘이 그늘을 끊고 당신에게 뛰어내리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이기도 하겠습니다 어떤 성의 있는 그늘은 당신을 서사적으로 기록하거나 수도사로 매도할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는 중에 당신이 나누어 마신 그늘은 그늘로 환승 중일 테고 양떼를 몰고 초원으로 달리는 광대는 콧대가 한껏 높아질 것입니다

 

시집 『아무도 모르게 그늘이 자랐다』(달을쏘다, 2021)

 

 


 

강재남 시인

경남 통영에서 출생. 2010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이상하고 아름다운』(세종도서문학나눔 선정) 과 『아무도 모르게 그늘이 자랐다』가 있음. 한국문화예술유망작가창작지원금 수혜. 한국동서문학작품상, 동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