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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영미 시인 / 전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5.

전영미 시인 / 전언

 

 

무언가 잠시 반짝인다

찢겨진 너의 그림자안에서

 

그렇게 쉽게 뭉개지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네 안에서 눈 뜨고 있으니

 

어둠을 끌어다 덮고 있는 자여

그대로 잠깐 잠들어도 된다

너는 땡볕 아래서 너무 오래 떨었으니

 

빙하 속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던 자여

이제는 흘러가도 좋다

너는 네 시린 발을 기억하고 있으니

 

오랫동안 깨진 거울을 들여다보던 자여

서둘러 새 거울을 사야 한다

너는 네 얼굴을 안다고 오해하고 있으니

 

그렇게 쉽게 꺾이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또다시 연한 이파리들이 돋아나는 걸 보았으니

 

내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자여

결국은 네 스스로 기억해낼 것이다

너는 이미 내게 이 모든 걸 들려준 적 있으니

 

ㅡ『시인동네』(2019, 11월호)

 

 


 

 

전영미 시인 / 거기, 누구세요?

 

 

태어났을 때 난 이미 낡아 있었지

누군가 쓰다버린 팔다리를 주워다

정성스레 꿰맨 자국이 있고

해변에 뒹굴던 머리통을 주워다 얹었는지

수시로 머리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지

 

엄마라고 처음 내뱉은 순간 입에선 나방이 쏟아졌지

껍데기를 둘둘 감고 있던 번데기는 그새 부화했고

겨우 찾은 내 목소리에선

노인의 쉰 소리가 섞여 있었지

 

북극성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내 눈은 이미 북극성을 알고 있었지

원래 누구의 눈이었을까

 

이상할 만큼 가늘고 옅은 손금

수레바퀴가 한 바퀴, 두 바퀴 구르는 걸 세다가

숫자들이 사라지고 바퀴가 구른다는 것조차 잊어버렸을 때

손금도 조금씩 사라졌지

거울 볼 때마다

한 번도 나를 알아볼 수 없지

 

당신, 아니 나는 누구세요?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5. 12월호

 

 


 

전영미 시인

대구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문예창작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15년《시인동네》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