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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세훈 시인 / 첫사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6.

정세훈 시인 / 첫사랑

 

 

녀석이 나보다

부잣집 아들이었다는 것도

학업을 많이 쌓았다는 것도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도

그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았다

 

다만, 녀석이

내 끝내 좋아한다는 그 말 한마디

전해지 못했던 그녀와

한 쌍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적

 

난 그만

녀석이 참으로 부러워

섦게 울어버렸다

 

 


 

 

정세훈 시인 / 단풍 들 때

 

 

나의 생이여 즐거운가 그렇다면 그 즐거움은

단풍 들 때 동맥 끊듯 끊어지거라

행여 도적같이 지나온 전생이었든

혹여 찰나같이 닥쳐올 내세이든

차마 하지 못하고, 못 할 사랑

엉겁결에 저질러놓고

행복에 겨워 있다면 그 행복 단풍 들 때

가을 볕 수수 모가지 잘라지듯 잘라지거라

천상의 고통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지상의 고통이 천상으로 올라가는

그리하여 머지않아 발가벗겨질 온 천지가

울긋불긋 울긋불긋 단풍 들 때

나의 생이여 아름다운가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은

단풍 들 때 마른 지상에 물 번지듯 지워지거라

 

(정세훈 시집, <등면>, 도서출판 b, 2021)

 


 

정세훈 시인

195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 1989노동해방문학1990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 맑은 하늘을 보면, 저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끝내 술잔을 비우지 못하였습니다,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부평 4공단 여공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