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훈 시인 / 첫사랑 녀석이 나보다 부잣집 아들이었다는 것도 학업을 많이 쌓았다는 것도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도 그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았다 다만, 녀석이 내 끝내 좋아한다는 그 말 한마디 전해지 못했던 그녀와 한 쌍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적 난 그만 녀석이 참으로 부러워 섦게 울어버렸다 정세훈 시인 / 단풍 들 때 나의 생이여 즐거운가 그렇다면 그 즐거움은 단풍 들 때 동맥 끊듯 끊어지거라 행여 도적같이 지나온 전생이었든 혹여 찰나같이 닥쳐올 내세이든 차마 하지 못하고, 못 할 사랑 엉겁결에 저질러놓고 행복에 겨워 있다면 그 행복 단풍 들 때 가을 볕 수수 모가지 잘라지듯 잘라지거라 천상의 고통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지상의 고통이 천상으로 올라가는 그리하여 머지않아 발가벗겨질 온 천지가 울긋불긋 울긋불긋 단풍 들 때 나의 생이여 아름다운가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은 단풍 들 때 마른 지상에 물 번지듯 지워지거라 (정세훈 시집, <등면>, 도서출판 b,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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