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연 시인 / 달의 은둔 그렇습니다 앞에 가는 사람은 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의 주인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날이 어두워서 무서워집니다 저편에서 했던 말이 이편으로 들려오는 데에는 밤이 제격입니다 밤이 맞습니다 누구의 걸음인지 많이 걸어도 저편에 가 닿지 않습니다 이편에 와 닿을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앞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저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쯤 나도 무사히 집에 도착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밤의 세계는 화덕의 불처럼 타오르다 의식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참 이상한 날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편지들이 하늘을 덮었습니다 내일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어디선가 다시 만나야 하겠지만 우리의 소멸은 남겨 둬야겠습니다 주인이 말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집니다 우리는 때때로 완전히 서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계간『시와 문화』 2019년 봄호 발표 이재연 시인 / 눈의 나라에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남아있는 잎들이 땅에 떨어지고 눈 내린다 말간 죄처럼 눈 내린다 소리를 더 크게 지를 수도 없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일을 더 오래 할 수도 없어 죄 없으면 끝없이 따라가고 싶은 흰 길을 걷는다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소리 듣린다 흩날리는 눈을 온종일 받아먹고 침묵에 휩싸이는 언덕 내가 왜 나를 밖에 세워두고 눈이 오는 소리를 측량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너는 멀기만 하고 눈은 내린다 어디에서도 우리들의 잔해가 조용히 묻히어 간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비탈길을 내려간다 텅 빈 손을 허공으로 뻗어 상처 없는 눈을 손바닥에 받아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을 메모한다 너는 없고 나는 있다 이것을 눈의 나라에선 순수의 무게라 한다 슬픔의 하중이라 한다 걷다보니 애송이 같은 짐승의 발자국 하나 눈밭에 떨어져 있다 계간『시애』 2021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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