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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은산 시인 / 빛의 탄생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6.

고은산 시인 / 빛의 탄생

 

 수척한 빛을 털어내기 위해, 틈 없는 밤의 격자 공간 속을 멍하니 바라본다. 머리를 움켜쥐고 공간을 바라보니 실금이 가기 시작 한다. 실금 사이로 청어빛 언어가 들락거린다. 언어의 들머리는 빛이 없었으나, 틈을 통과하는 순간 바뀌는 놀라운 변화. 지나가는 출출한 시간이 이마를 맞대고 변화의 손을 부드럽게 잡는다. 마른 손이 반들반들해지고 온통 청어빛으로 물든다. 손은 바다이 다. 사이가 더 벌어지는 순간, 시의 미끌미글한 뼈의 마디마디를 갈고 닦는 바다에 푸른빛이 넘실거린다. 파도 안에 수많은 빛이 출렁인다.

 

 


 

 

고은산 시인 / 독백

 

 얼멍얼멍, 욕망의 나무숲, 촘촘히, 우뚝우뚝 솟아 있었네. 마음의 등뼈를 세웠네. 휘적휘적 등뼈가 흔들거렸네.

흔들흔들 바람 따라갔네. 바람은 푸르름 속으로 자맥질하였네. 파릇파릇 푸르른 시절이었네. 푸른 노래를 입 속에 담는, 어둠을 몇 모금 마시는 시간이었네. 어둠은 붉은 불빛이 드러누운 거리를 밟고 있었네. 검은 동공 속 유곽이 붉은 춤을 추었네. 유곽에 몸을 넣었네. 푸르름이 감전되었네. 감전된 시간이 물고기처럼 파닥였네. 파닥임이 꺼멓게 매캐한 연기를 뿜었네. 매캐한 연기 속 변종의 피톤치드 없는 편백나무만 자랐네.

 

 혓바늘 돋아나는 입속 같은, 통증 없는 간장 질환 같은

 욕망의 나무숲.

 

 


 

 

고은산 시인 / 근육이 빛나다

 

 설움의 꼬리뼈를 잡아당긴 손이 파리하다. 파리한 실핏줄 속이 하얗다. 하얗게 야윈 두루미가 추운 새벽을 깨우며 홰를 친다. 홰를 치는 날갯죽지가 물무늬 상상을 털어낸다. 상상이 아침의 깃을 치며 날아오른다. 궁창 속으로 날아오른 새의 발톱이 빛난다. 빛은 설움의 껍질 벗겨낸 섬유질로 직조된 하늘의 근육이다. 설움이 갈라진 등딱지 사이로 빛이 파랑친다. 근육이 빛난다. 얼굴에 은빛 향기가 돈다.

 

 


 

 

고은산 시인 / 침향 枕香

 

 희망의 단단한 외피外皮, 살갗 속, 꽃술에 벌이 날아와 수많은 꿀을 묻혀 날아오르는 것처럼, 은어 떼 가두는 가두리 양식장 같은 밝은 빛이 가득해진다. 너무 부풀어 오른 껍질은 약해져 상처가 난다. 상처 속으로 잿빛 가루가 환한 빛과 섞인다. 어두운 쪽에 포만감이 없는 수은빛 가루를 뿌린다. 포만감에 빠지지 않은 외피 속은 터지지 않는 울금향 향기가 너울거린다. 아문 상처 속, 마음의 혈관에 침향의 진액이 흐른다.

 

 벌 한 마리 꽃 위에서 희망의 꽃술을 핥고 있다

 


 

고은산 시인

전북 정읍에서 출생.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2010리토피아로 등단. 시집으로 말이 은도금되다(리토피아,2010) 실존의 정반합이 있음.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