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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태일 시인 / 어머니 곁에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5.

조태일 시인 / 어머니 곁에서

 

 

온갖 것이 남편을 닮은

둘쨋놈이 보고파서

호남선 삼등 열차로

육십 고개 오르듯 숨가쁘게 오셨다.

아들놈의 출판 기념회 때는

푸짐한 며느리와 나란히 앉아

아직 안 가라앉은 숨소리 끝에다가

방울방울 맺히는 눈물을

내게만 사알짝 사알짝 보이시더니

타고난 시골 솜씨 한철 만나셨나

산 1번지에 오셔서

이불 빨고 양말 빨고 콧수건 빨고

김치, 동치미, 고추장, 청국장 담그신다.

양념보다 맛있는 사투리로 담그신다.

- 엄니, 엄니, 내려가실 때는요

비행기 태워 드릴게.

- 안 탈란다, 안 탈란다, 값도 비싸고

이북으로 끌고 가면 어쩔게야?

옆에서 며느리는 웃어쌓지만

나는 허전하여 눈물만 나오네.

 

-<한국일보>(1971)

 

 


 

 

조태일 시인 / 겨울꽃

 

 

겨울 벌판 어느 후미진 곳에

마를 대로 마른 꽃들이

더러는 하늘을 쳐다보고

더러는 주위를 돌아보며

더러는 땅을 굽어보며

허연 눈발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휘어진 세상 휘어진 몸을

가까스로 견디며 흐느끼고 있다

 

 


 

 

조태일 시인 /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풀꽃을 꺾는다 하지만

너무 여리어 결코 꺾이지 않는다.

피어날 때 아픈 흔들림으로

피어 있을 때 다소곳한 몸짓으로

다만 웃고만 있을 뿐

꺾으려는 손들을 마구 어루만진다.

땅 속 깊이 여린 사랑을 내리며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에

노래 되어 흔들릴 뿐.

꺾이는 것은

탐욕스런 손 들일 뿐

 

 


 

조태일(趙泰一) 시인(1941년-1999년)

전남 곡성 출생. 1970년대 유신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시를 발표하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경희대 대학원 문학 석사. 박사학위. 196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1969년 월간 시 전문지 〈시인〉을 창간. 1989년 이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임. 1994~1999 예술대학장을 역임. 시집 〈식칼론〉 〈국토〉, 〈가거도〉 〈연가〉 등을 펴냄. 1992년 편운문학상, 1995년 만해문학상. 사후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