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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승영 시인 / 형광펜은 언제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5.

유승영 시인 / 형광펜은 언제나

 

 

 하루 세 알의 알약을 먹어요 한 알은 먹자마자 토하고 또 한 알은 정신을 말짱하게 해주니 하루가 잘 굴러가요 나머지 한 알은 눈을 감고 삼켜야 해요 눈알이 뻑뻑해지면 곤란하거든요 노란 아이는 세 알 먹기로 하루를 시작해요

 

 세 알의 알약은 땅따먹기에요 네모와 세모의 땅을 한 발로 저 윗 칸까지 가야 해요 어떻게든 금을 밟지 않고 하늘까지 알약을 향하여 던져놓은 망을 향하여. 까치발로 비틀비틀 금을 밟지 않고, 쏟아지는 알약 쏟아지는 졸음 쏟아지는 별빛

 

 오늘 간식은 복숭아였니 우유였니 복숭아도 우유도 아니었어요 할머니와 아이는 노랗게 입을 오물거려요 할머니보다 빠르게 현관으로 달려가 노란 버튼을 눌러요 노란 할머니와 노란 아이는 날마다 함께 등원을 해요

 

 심장 박동기를 달고 나서야 알약이 사라졌어요 알아서 뛰어주고 알아서 밥도 먹구요 자동판매기에서 노란 알약이 튀어나와요 밥이 모래알 같을 때 우리 모두 알약을 먹어요 식후엔 언제나 알약이죠 생각을 모으는 것은 알약이 최고예요

 

 


 

 

유승영 시인 / 우리는 영원히 미끄러진다

 

 

우리는 하루에 세 번식 등글게 모였습니다

 

머리가 닿을 듯 말 듯 언제나 무릎을 꿇고 그렇게

창문엔 성에가 내렸고 성에 너머로 늘 크리스마스는 왔어요

달그락 달그락, 칸칸이 놓여진 블록집에서 얼음처럼 지냈어요

어떤 날엔 미닫이, 미닫이에 쏟아지기도 했고

귀퉁이들이 가벼워서 늘 기우뚱했고 아이는 늘 열이 났어요

 

골목 골목 양철이었어요

행상을 마치고 돌아온 여자는 날마다 양철처럼 반짝였고

형무소처럼 나치의 뿌듯함처럼 매섭게 반짝거렸던 거죠

붉거나 더욱 붉게 웃거나

시집올 때 가져온 여자의 솜이불에도

목단은 늘 함박눈처럼 자랐어요

 

그 이불을 평생 덮고도 부자는 되지 못했지만

그 붉은 목단은 양철판 위에서 날마다 자랐던 거에요

뜨겁거나 가볍게,

깡통처럼 양철처럼,

 

내 심장을 처음으로 뛰게 했던 것도 양철 대문이었어요

 

-<서정과 현실 > 2012 상반기호

 

 


 

유승영 시인

2011년 《서정과 현실》 신인상을 통해 등단. 2018년 시집 『하노이 고양이』 출간. 2021년 동인지 <시골시인 K> 걷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