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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영희 시인 / 모닥불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1.

안영희 시인 / 모닥불

 

 

아무도 혼자서는 불탈 수 없네

 

기둥이었거나 서까래,

지친 몸 받아 달래 준 의자

비바람 속에 유기되고

발길에 채이다 온 못질투성이,

헌 몸일지라도

주검이 뚜껑 내리친 결빙 등판에서도

불탈 수 있네

바닥을 다 바쳐 춤출 수 있네

목 아래 감금된 생애의 짐승울음도

너울너울

 

서로 포개고 안으면

 

 


 

 

안영희 시인 / 숯불

 

 

우리는 왜 온전히 타지 못했을까

 

컥컥 숨차고

목이 아파 울었을 뿐

아무리 애 태워도 매운 연기만 피어올랐다

그때는,

무엇이 되기엔 너무 이른

준비 없는 열정, 생나무 가지들이었을까

 

햇빛과 바람의 거리 알 수 없는 눈보라의 골짜기

천만 개 밤을 헤매느라

그 피 삭고 물기 다 말려

 

꽃처럼 아름답게, 꽃보다 처절하게

불로 피어나는 몸

 

 


 

 

안영희 시인 / 카드를 대세요

 

 

날 허락한 용문 행 기차

푸른 들판을 질러

덕촌2리 마을회관 앞까지

날 실어다 준 중원리 행 버스는

내 카드의 밥을 움푹 우움푹 덜어 먹는다

충전기에 카드를 넣으면

충전할 금액을 클릭하세요,

그러나 날 세상에다 내놓을 때

당신이 내게 충전한 금액이 얼마인지

나는 읽을 수 없고, 내 생의 잔량이 얼마큼인지

나는 가늠할 길 없으므로

살구꽃벚꽃매화꽃충전 탱탱한 생명들

꿈속처럼 천지간에 꽃잎 날릴 때에

혹은, 어느 깜깜한 밤 어느 낯선 비바람의 거리에

예비도 없이 나는 폐기될 것이다

빈껍데기가 되어

 

<사용법>

재충전 불가, 재생 불가함.

인 내 목숨은

한 장, 새로 발급하면 그만인 당신의

낱장 카드일 뿐이니까

 

 


 

 

안영희 시인 / 찔레

 

 

누가

지등紙燈을 걸고 있니

불 꺼진 기인 회랑에

 

누가 질주하다 넘어져 운

불과 바람의 사계 돌아봐, 돌아봐 하는 거니

 

부재인 듯 종일토록 머릴 박은

노동의 손을 씻으며

시나브로 지워지고 있는 이 저녁답

 

사람아, 나도 저 흰 꽃이고 싶다

가만한 향내 허기 지운 저 눈빛으로

문득 읽히고 싶구나

 

지친 귀로의 그대에게

 

 


 

 

안영희 시인 / 철새

 

 

새벽 산길을 가네

 

덜 떨친 잠과

더께 진 미혹의 유리창,

내 영혼

햇푸성귀 잎사귄 양 헹궈 올리며

샘물 찰박대던 새소리들

들리지 않네

 

나무들 울울창창하던 때

새들의 시간, 하고 내가 이름 불렀던

바로 그 시간대인데

 

없네, 지금 저 숲에는 그 이쁜

새들의 기척이라곤 없네

 

아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네

그대 떠나가 버린 빈숲,

우리가

그 누구의 생애에도

, 나 가 는 철새임을 알지 못했네

 

 


 

안영희(安榮姬) 시인

光州에서 출생. 1990년 시집 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로 등단.내 마음의 습지, 가끔은 문 밖에서 바라볼 일이다, 물빛창, 그늘을 사는 법』 『어쩌자고 제비꽃. 흙과 불로 빚은 - 도예개인전(경인미술관)이 있음. 문예바다 문학상 수상. 현재 계간문예바다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