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 시인 / 한 그루 포도나무 가파른 플로렌스 언덕을 올라가다가 포도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오후 세시의 햇살 아래 쓰러질듯 비탈진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신음소리 곁가지를 잘라낼 때마다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비틀리고 휘어진 온갖 결이 아찔하고 불끈하다 무성한 잎사귀 아래 조용히 익어가던 포도송이들 벌과 나비들의 오후가 밟히고 짓이겨져 캄캄한 어둠 속 긴 겨울을 보내고 있다 햇살 때문일까, 눈이 부시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 포도나무 한 그루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마신 한 잔의 포도주는 그의 붉은 피이고 내가 본 것은 그가 잃어버린 빛이었다 햇살에 시달리던 내 두 발 세상의 언덕에 깊이 묻는 순간이었다 플로렌스 언덕에서 나를 만났다 시집 『이혼을 결심하는 저녁에는』(서정시학, 202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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