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운진 시인 / 설야(雪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3.

이운진 시인 / 설야(雪夜)

 

 

눈이 와요,

라는 말 얼마나 유정(有情)한지

함부로 전하지 못하겠네

 

창 밖에는 사르륵 사르륵

마치 전생의 장례식 같은

고요

한 없이 깊어가고

 

눈 오는 소리 안에는

내 귀에만 들리는 목소리 낭랑해지는데

 

눈이 와요,

이 무용한 독백은

끝내 허공을 건너지 못하네

 

눈송이 눈송이

내려와

한 그루 나무의 실루엣이 바뀌는 동안

나무보다 먼저 마음을 다 덮고

나는 생각하네

 

왜 추억은 아직도 눈빛을 약속하려 하나

왜 나는 조각난 기억을 붉은 심장인 듯 지키려 하나

 

기억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찾을 수 없는 밤

그 먼 시절로부터

흰 눈이 오네

 

-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천년의시작, 2020)

 

 


 

 

이운진 시인 / 빈 항아리

 

 

빈 항아리에 눈이 내린다

저녁을 굶은 아이와 젖이 마른 엄마가 부둥켜안은 것처럼 둥근

새벽에 울려 퍼지는 수도원의 종소리처럼 둥근

항아리에 눈이 내린다

운명이 없는 눈송이들이 항아리에 담긴다

가장 멀리서 가장 깨끗하게 온 것들을 담아

어떻게 이토록 자기의 가슴을 슬프게 만들 수 있는지

빈항아리는 차곡차곡 눈을 쌓는다

슬픔을 발효시키려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간이 필요하다는 듯

둥근 자세를 바꾸지 않고

모든 기도를 다 드린 마음처럼 둥글게

항아리는 비어 있다

 

 


 

이운진 시인

1971년 경남 거창에서 출생. 동덕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석사 졸업. 1995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문학의전당, 2006)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