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시인 / 불새
퇴근길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골바람 불냄새를 따라가다 아버지 냄새를 따라가다가, 리어카로 된 낡은 둥지에 깃털을 음츠리고 앉아 있는 오래된 불새를 보았다 구들장이 식어지는 새벽답 불목으로 불길을 밀어 넣던 아버지의 화덕한 얼굴이 녹슨 의자에 앉아 있었다 불에 달궈진 노란 진액이 가슴 밑바닥을 후려쳐 솟아오르는 눈물인 듯 훌쩍이며 드럼통을 타고 내렸다 절정의 냄새를 보듬으며 둥지주변을 서성거리는 불새의 곱은 몸짓 울 때가 되면 울고, 날 때가 되면 날아가리니 맛있는 불길이 아지랑이로 부리에서 흩어져 피어날 때 아버지는 불새알 같은 군고구마를 꺼내셨다 꺼지지 않은 불씨가 담긴 아버지의 아궁이 위로 내리는 싸락눈 불새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권혁재 시인 / 시집을 바람맞히다
시월에 어느 시인이 보내준 시집을 아내가 받아 거풍을 시키려다 베란다 문살에 끼워두고 잊고 지냈다
아직 뜯지 않은 겉봉투에 비와 바람, 추위와 허기 그리고 울음으로부터 창문을 두드리며 담쟁이처럼 뻗어난 새로운 시들,
퉁퉁 불은 시집을 만지작거리며 굽어진 시의 길을 펴면서 읽었다 블룩한 갈피를 넘길 때마다 라라파비안의 아다지오 노래가 끝나도 바람에 쏟아진 커피가 흘러 번져도 비에 시집냄새가 옅어져도 나는 시집을 바람맞히며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시의 행간에서 빠져나간 잉크자국이 뒤쪽의 행으로도 연결되는 물먹은 시간을 시집은 어쩌면 다시 말리면서 견디어 왔으리라
마른 갈피가 뻣뻣해진 두께로 손에 와 닿을 때 한 길로 모인 시들이 거뭇거뭇 다가왔다
시집이 팥같이 알맞게 잘 불은 동짓날 저녁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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