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안 시인 / 도배의 정의
사소한 기척도 들키던 방 당신이 떠나고 흔적을 벗겨내요 벽면에는 당신이 발라놓고 간 처음으로 가득 차 있어요 먼저 달력을 떼어내요 쓸모가 사라진 숫자가 먹먹해요 일 년은 너무 긴 공간인가요 낱낱이 눈빛을 지운 오늘 같은 어제들 어떤 동그라미는 무모하게 기억을 기념하려 하죠 액자 앞에서는 일 초간 멈칫해요 어색한 자세 앞에서도 이젠 웃을 수 있어요 옆은 흔하고 다정은 멀어서 정면을 볼 때 팔은 태도를 잊었을까요 함께여서 믿었던 완벽한 포즈 정지된 표정과 자세를 누가 먼저 풀었을까요 시계가 멈춘 이유가 배터리 탓이라고요 아니죠, 한쪽으로만 돌던 시간이 방전된 건 순전히 철거 때문일 거예요 엉덩이에 유적을 쌓던 책상도 모니터도 넋을 놓았어요 책장은 왜 한결같이 근엄한가요 다시 읽으려는 다짐이 버리려는 각오보다 힘센 이유를 책들은 말해주지 않아요 언제나 버리는 데는 결기가 필요하죠 감정도 한꺼번에 드러낼 수 있게 전집 같으면 좋겠어요 이별을 위한 부록도 필요 없게 말이에요 벽은 이 모든 걸 지켜본 방관자죠 어떻게 한결같이 모르는 척 벽만 될 수 있을까요 시멘트처럼 한번 굳어진 것들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아나 봐요 벽은 스스로 균열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니까 벽지는 가장 완벽한 위장술인 거죠 자, 이젠 전부 뜯어내 볼까요
월간 『모던포엠』2022년 7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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