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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석호 시인 / 거미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2. 9.

한석호 시인 / 거미줄

 

 

누군가를 옭아매기 위해 쳐둔 그물에

삶이 걸려 바둥거리고 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하고 있지만

점점 깊숙한 곳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서서히 사지는 마비되고

공포의 그림자가 밀려오겠지?

꿈이기를 빌고 또 빌겠지만

세포들 절규하며 마구 달아나겠지?

자신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은

스스로는 돌아 본 적 없다는 뜻이다

나만 진리고 타자는 틀렸다며

세상을 맘대로 재단해왔다는 뜻이다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절망의 그물 위로

바람이 한바탕 후려치고 간다

거미줄은 최후의 순간까지 놓지 않을 것이다

숨이 끊어지도록 설계한 삶의 뜻대로

 

 


 

 

한석호 시인 / 카페, 바그다드

 

 

잿빛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

아데니움이 팔 벌려 맞는 카페가 하나 있지요.

메뉴는

'무거운 짐 받아주고

모래바람과 함께 실컷 울 수 있는 방과

별빛에 귀 씻으며

가슴의 바람소리를 연주할 수 있는 발코니‘

때만 잘 만나면

푸른 노을과 손잡은 붉은 튤립의

눈물겨운 사랑이야기도 만져볼 수 있는 곳

싸매두었던 내면을 꺼내

한 잔의 낭만과 함께 세팅하고 싶다고요?

그렇다면

돌아갈 곳을 잃은 나팔수의 낡은 입술도

색소폰의 언덕 어디쯤에 그려 두시면 좋겠어요

짐승들이 그린 밤하늘 정원에서

꽃들이 라쿠차를 추는군요

말을 닫아걸고 천문을 산책하면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밀랍인형의 눈이 빛날 겁니다

한 시대를 품에 안는

비움을 메뉴에 올리는 문제로 골똘하지만

사랑을 잃은 가슴을

수수꽃다리의 은은한 그늘에 밀어 넣고 그윽하게

울어보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저런... 잠을 잊으셨다고요?

디저트로 따뜻한 아랫목을 주문해 놓겠습니다

둥근 저수조가 휘파람을 불고

가시선인장이 종소리 가득 차를 담아 내오는

카페 바그다드에 가본 적 있나요?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있고

낙소스섬의 아리아드네가 노래하는

카페 바그다드에서 뵈어요, 당신의 1호선과

나의 6호선이 만나는 그곳에서, 딱 2분 거리에 있는

 

-한석호 시집 『먼 바다로 흘러간 눈』

 

 


 

한석호 시인

1958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경희 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7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이슬의 지문』(천년의시작, 2013)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