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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은기 시인 / 객관적인 방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30.

정은기 시인 / 객관적인 방

 

 

읽는 법을 바꿔볼까 생각했다

어제 생각했다, 읽을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기에

방의 구체를 떠올리는 일은 전략이 필요했다

 

격렬한 방,

아우성치는 방,

어제 벗어둔 동작들이 얽혀 있는 방,

방은 사상보다 행동으로 가득 찬다

 

문을 닫을 때만 염소들은 책장을 들이받는다

그리하여 초원으로 사라지는 방

 

한때 그 방에서 건물의 구조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건물의 뼈대와 함께 허공의 잔해를 품고 있는 방의 고민에 대해 시를 쓴 적이 있다 그때 방은 허공에 대해 고민했고, 나의 고민이 방 밖에서 맺히듯 나의 정체는 내 밖에서만 견고했다

 

비가 올 때마다 물이 샌다

나의 동작은 퉁퉁 불어, 운다

문을 닫을 수 없는 이유다

문을 닫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격렬을 이겨야 한다

지금까지의 독법으로는 문을 열 수가 없다

 

가만히 누워 움직이지 않는 작전으로

밤새 부풀어 방을 가득 채우는 잠,

그리하여 어떠한 정서도 파생시키지 못하는 밤,

어느 페이지에서 짐승의 털이

쏟아지곤 했다

 

-『시인동네』 2013년 봄호

 

 


 

 

정은기 시인 / 목발

 

 

빛이 잘 드는 곳에 그녀를 내려주었다

오른쪽 발과 오른 손을 따라 머리가 먼저 빠져나가고, 왼발에 이어

엉덩이가 밖으로 쏟아져 내렸다

 

빈자리만 태우고 후진하는 나의 미러 속으로 불쑥 뛰어든 목발 하나

앞만 보고 걷는데도 왼쪽으로 기울고 있다

 

함께 놀다가 두고 온 웅성거림과 낙서와 낭설의 주인공들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사랑이라 기록되지 않고,

운동과 물질로만 기억되었다

 

다음에는 가장자리가 없는 곳에서 만나자

한쪽으로 기울고 있어도 늘 중심이 되는 곳,

 

소문의 주인공들은 한번도 똑바로 걸어본 적이 없었다.

 

 


 

정은기(鄭恩技) 시인

1979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와 同 대학원 졸업. 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차창 밖, 풍경 빈곳〉이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