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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가림 시인 / 북(北)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30.

이가림 시인 / 북(北)

 

 

사철 석탄가루를 싣고 오는

열하 승덕(熱河承德)의 바람 속에 서서 엄마는

홍건적(紅巾賊)같이 무섭기만 한 호밀들의 허리를

쓰러넘기며 쓰러넘기며

부끄러운 달을 마중하였다 멀리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는 외길 따라

눈물 나는 행주치마로 가고 있었다.

마른 말똥거름 따위 검불 따위

꺼멓게 널린 모닥불의 방천 둑을 지날 때마다

어찌나 키 큰 송전선주가 잉잉 울었던지

귀신처럼 무서웠다 지연(紙鳶)이 목매달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이던가 애견(愛犬) 쫑이 죽고

빨간 새끼들만 남아 기어다니는 헛간

나도 한 마리 강아지 되어 바자니던 것을

오줌싸개의 나라에서는 자주 폭군이 되어

활 쏘는 이순신의 손자의 손자

한 웃음소리에도 어둠이 무너지고

한 돌팔매에도 참새떼들은 떨어졌다

노을 속 참깨를 뿌린듯이

 

 


 

 

이가림 시인 / 물총새잡이의 기억-2

 

 

황토 비탈에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다

거기 보숭보승한 백도(白桃)빛 얼굴의

낙구네 누나가 살고 있었는데

그 누나의 뺨이 유난히 고운 것은

머잖아 죽게 될

폐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방 바위 지나

각시 바위에 다다르자마자

우리 개구쟁이 녀석들은

헐떡이는 개구리마냥

첨벙첨벙 냅다 냇물에 뛰어들어

서리해 온 풋복숭아를

주둥이가 찢어지게 물어뜯었다

 

살갗이 수밀도 껍질처럼

아프게 벗겨지던 여름

오줌 멀리 싸기에서 이긴 날의

낄낄대던 참외배꼽이여!!

 

 


 

 

이가림 시인 / 철로 부근(鐵路附近)

 

 

양철지붕이 널려 있는 소도시의

철로 부근

꽁초를 윽깨리며

이제는 훌훌히 흩어졌다 모인 생활의

퀴퀴한 에트랑제

,

잃어진 시간의 주변에서

어둠이 내리는 지역.

여름,

가을,

겨울이 지쳐서 가고

어쩌면 북녀(北女)가 돌아간 후조(候鳥)의 기록.

 

고달픈

간밤의 꿈을 새우기도 전에

기관차는

기적(汽笛)을 먹고 살아가는 끄름의 수난(受難)이여,

 

녹슨 기중기의 날개에 할딱이는

철로부근의 계절

해가 지고,

나와 나의 이웃들이

밤에는 더 슬픈 태양을 지고 가는

멍들은 주막의 향수.....

 

머리를 떨어뜨린 채

어느 건널목

가래침을 꽁초에 뭉개고는

그는 웃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해가 지고 또 달이 찼다........

 

 


 

 

이가림 시인 / 첼로는 힘이 세다

 

 

1992년 5월 27일 오후 네 시

사라예보의 바세 마스키나 시장 뒤쪽에서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던 동네 사람들 머리 위로

느닷없이 여러 개의 박격포탄이 떨어졌다

 

이튿날 스물두 명의 피가 얼룩진그 빵가게 앞에서

사라예보 필하모닉 첼로 연주자

베드란 스마일로비치가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후 22일간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시퍼런 칼보다 더 예리한 활로

슬픈 첼로의 가슴을 베었다

 

왜 세르비아 저격수들은

그를 향해

총을 쏘지 않았을까

 

아아! 천 개의 박격포탄보다 강한 첼로여

저격수의 방아쇠를

끝내 당길 수 없게 한

나직한 진혼곡이여

 

-유고시집 <잊혀질 권리> 시학 2018

 

 


 

이가림 시인(1943~2015)

1943년 만주 열하에서 출생.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루앙대학교대학원 불어불문학과 박사.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빙하기」 당선. 1973년 첫시집 <빙하기>. 그 외 시집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슬픈 반도> <순간의 거울> <내마음의 협궤열차> <바람개비별>. 산문집 <사랑, 삶의 다른 이름>. 에세이집 <미술과 문학의 만남>. 그외 역서 <촛불의 미학> <물과 꿈> <꿈꿀 권리> <살라방드르가 사는 곳> 등. 한국펜클럽번역문학상, 유심작품상, 편운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수상.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2015.7.14 루게릭으로 투병 중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