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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서빈 시인 / 무풍지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31.

이서빈 시인 / 무풍지대

 

 

외할머니는 혼수품에서

선풍기를 뺐다.

딸 곁에 바람 한 점 불지 말라고

바람이라는 서늘한 목록을 지워버렸다.

 

오만가지 잡 바람에

집을 날리고 전답을 날리더니,

딸만은 바람맞는 일 없이 살아야 한다며

선풍기를 사러 나간 이모에게

바람을 맞혔다.

 

무풍지대로 시집을 간 이모는

바람은 없을 거라 굳게 믿었다.

분명 바람 한 점 가져가지 않았는데

웃음 뒤편에 검은 구름이 돋고 있었고

먹구름 묻은 돌풍에

우지끈 서까래와 대들보가 내려앉았다.

이바람, 저바람, 만지던 이모부

어느날 바람으로 사라졌다.

 

바람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바람과 더불어 사는 것

그것을 알기까지 이모는

갖가지 된바람을 만나야했다.

 

딸이 일으킨 바람에 쓰러진 외할머니

대신 바람을 막느라 중풍을 맞았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무풍지대는 없었다.

 

 


 

 

이서빈 시인 / 2인분 고독

 

 

밤기차에 무작정 몸 싣고 달릴 때

달이 함께 동행했어

나뭇가지에 걸렸다 산 뒤로 숨었다

내 걱정 한 보따리 이고 나뭇가지 뒤로 산 뒤로 숨고 숨으며 보살폈어

깜깜한 무덤속에 누워 있던 엄마

딸 안부 걱정스러워 달뒤에 숨어서 따라 다니고 있었지

 

글썽 글썽, 죽어서도 글썽이는 지독한 사랑

 

엄마 며느리 아내

파먹기만 하는 기생충 사이서 타인의 삶만 살았지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눈빛에 찔려 늘 타인의 삶을 살다

걱정이 팔자라 죽어서도 관뚜껑 열고 나와 근심을 따라 다녔지

먹구름 눈 비 바람 그림자로 따라다니며

뼛속까지 걱정으로 뭉친

기차 기적소리 멈추자 관뚜껑 닫는 소리 덜컥, 나더니

관뚜껑 빼꼼 열고 오랫동안 근심을 흔들고 서있는

 

죽은 날짜 허공에 던지면 구름이 되고

산 시간 허공에 던지면 읽다만 문장 된다는데

그 세상도 이 세상도 아닌 중간 쯤 그 어디서

수천만 년을 미완성으로 기다릴지

귀열고도 울음소리 듣지 못해 자꾸만 뒤 돌아보았어

 

 


 

이서빈(李書彬) 시인

경북 영주에서 출생. 한국 방송통신 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문학시대> 신인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달의 이동 경로』 『바람의 맨발』 『함께, 울컥』 민요시집 『저토록 완연한 뒷모습』이 있음. 한국 문인 협회 인성교육 위원. 한국 펜클럽 회원. 중랑 문화원 ‘남과 다른 시 쓰기’ 시창작반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