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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선희 시인 / 웅덩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5.

<등단시>

이선희 시인 / 웅덩이

 

 

길에도 상처가 있네

세상 발길질 혼자 감당한 듯

움푹 파였네

 

고름이 고여있네

손바닥만 한 그곳에

거침없이 빛 들어가네

상처가 끓네

 

딱지로 남은

꽃 이파리, 나무 삭정이, 날벌레

길이 가렵겠네

 

 


 

 

이선희 시인 / 보리수

 

 

새벽이었다

눈 떴을 때,윗목 벽에 개댄

아버지 담배 연기 넘어

너 죽고 나 죽으면 될 일이여

병든 아버지,저 어린애들 어떡해

엄마와 큰언니의 몸부림이 엉켜있었다

작은 언니와 오빠는 이불속으로 기어들었고

뒤뜰에서는 낮 동안 까치가 쪼다 간

보리수가 떨어지는지,툭 툭 잦은 소리 들렸다

많이 먹지 말라고엄마가 이르던

큰언니 입술만큼이나 고운 열매

오줌 누려는 듯 슬며시 빠져나온 나는

유난히 시고 떫은 설익은 보리수를

목이따끔거릴 때까지 따 먹었다

큰언니는 카페 여급이었다

우리에겐토해야 할 설익은 보리수였다

벌겋게 부어오른 눈두덩이였다

 

보리수나무 아래에 서면

지금도 목이 아프다

눈부터 벌겋게 부어 오른다

 

 


 

 

이선희 시인 / 사랑초

 

 

너를 그렇게 묻는것이 아니었던가

철쭉분 귀퉁이에서 세들어 살던

사랑초 한 뿌리 빈 화분에 옮겨 심었다

날이가도 날이가도

하트 모양 얼굴 보이지 않는다

분명 어떤 사정이 저 화분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철쭉분 귀퉁이에서 바라본 세상 덧없음을눈치채고

그저 자기 몫이라고 담아 안은 화분에 거름이나 되겠다고

푹푹 썩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라면나 사랑초 뿌리 거꾸로 묻은것이 분명할 게다

화분 아랫쪽으로 자꾸 잎파리 밀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여린 잎파리 햇빛 찾아 거친 흙을 뚫고 뚫고

바닥으로 바닥으로 바닥 끝까지 내려갈 참 일게다

그렇게 돌아 나오는 길이 어디 쉽겠는가

정성스레 물 주고 햇빛 잘 드는 곳에 옮겨 놓는다

신神이 내게 오는 길도 그런 길일게다

바닥 끝까지 닿았다가 돌아 돌아 오는길 일 게다

 

 


 

 

이선희 시인 / 산딸나무 대웅전

 

 

산딸나무 둥치에 돌무덤 수북하다

등산객 발치를 어지럽힌돌들

산딸나무 모두 끌어 안았다

그 돌들 참선에 들기까지 수없이 밑둥치 찍히었을 것이다

잔잔히 나풀대는 저 잎새의 미소로 어찌 알 수 없다

산딸나무 상처

 

산딸나무 아래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돌 하나에 소망 하나씩 얹은 쌓은돌탑들

쌓으면 무너지고 쌓으면 무너지고

무너지면서 쌓인 작은 소망들

산딸나무 저렇게품어 안았다

둥치의 돌무덤 재롱떠는 아가 같다

산딸나무 가지 끝에서 흔들리는 잎새에서

풍경소리 들린다

 

 


 

 

이선희 시인 / 만남

 

 

덜덜거리는 트럭 짐칸에 맨몸으로 실렸다

고만고만하게 찌그러지고

그냥그냥 견딜만한 상처를 가지고

트럭 덜컹거릴 때마다

한번씩 더 부딪치고 멍들어간다

사는거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한때 비뚤게 생을 꼬드긴 탓이다

모난 돌이 되어 새의 부리에 맞은 탓이다

선천적애정결핍 탓이다

굽이굽이굴러

내려진 곳은 시장의 좌판대

입심 좋은 아주머니의 덤 인심으로

검정 비닐 봉지에 담겨진다

뽀드득한 접시에 벗겨진 알몸이 시리다

군데군데 상처 난 사과

어느쓰디 쓴입의 단물이 된다

2007년《시와 경계》등단시

 

 


 

이선희 시인

충남 공주에서 출생. 2007년 《시와 경계》로 등단. 시집으로 『우린 서로 난간이다』 『소금의 밑바닥』 『환생하는 꿈』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