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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제야 시인 / 피아노 조율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6.

이제야 시인 / 피아노 조율법

 

 

사연이 점점

깊어지는 것보다

에피소드가 매일

많아지는 것이 나아

 

기념일은 어김없이 돌아오니까

 

어떤 이야기가 기념일이 되지 못하는 것은

혼자 깊어지기만 하기 때문이래

 

깊이를 어기는 쪽은 더 사랑하는 사람의 버릇

 

어쩌면 남은 이야기들은

소리가 되기를 기다리는 소음일지 몰라

 

처음 겪는 일이야,

가장 쉬운 위로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차이를 주자

 

아파도 기념일이 되자

깊은 너보다 많은 우리가 되기 위해

마치 처음처럼

 

한 번도 조율된 적 없지만

오늘도 피아노를 조율하자

 

깊은 기념보다 많은 기념을 위해

 

 


 

 

이제야 시인 / 시간과 보낸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에는

시간이 하는 일을 보았다

 

시간의 얼굴을 닮은

나의 의자에서 시간을 만났다

 

시간의 팔을 보는 일은

매일 쓰는 글자를 되감는 일

시간의 다리를 보는 일은

매일 걷는 바닥을 두드리는 일

 

내가 이름 지은 시간은

팔과 다리가 저린, 반복의 춤

 

나의 의자에도 시간을 주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에는

처음으로 시간이

변명 없이 느리게 갔다

 

내 권태가 건강해졌다

느린 시간이 이제

빨라질 것도 같다

 

 


 

이제야 시인

1987년생.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2012년 《애지》로 등단. 산문집으로 『안녕, 오늘』, 『그곳과 사귀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