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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인서 시인 / 말이 달아났다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6.

이인서 시인 / 말이 달아났다

 

 

 돌아갈 수 없다면 그곳이 낙원인지 모른다

 

 고물상에 끌려와 리어카에 묶여 있던 말들, 소리와 형상은 달아나고 달아나지 못한 기억들만 녹슨 스프링 위를 달리고 있다

 

 스피커 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우면 집집마다 치맛자락을 끌고 나오던 어린 눈동자들, 저마다 리어카 위 말에 올라탈 순서를 기다리곤 했지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타고 달리던 미국 영국 프랑스는 아직도 멀었는데 노래는 너무 짧아 달려도 늘 제자리이던,

 

 따각따각 말발굽 소리도 없이 나는 떠나왔구나

 

 말들은 제 등에서 달리던 아이들의 무게와 함박웃음과 혹은 도달할 수 없는 지명을 기억하고 있을까

 

 어느새 말들은 달아나고

 말 위의 시간들을 타고 너무 멀리 달려왔다는 생각

 

 녹슬어가는 기억들이 건초처럼 쌓여있는 마구간, 고삐도 없이 빈 잔등으로 서 있는 시간들은 여전히 되새김질에 열중이다

 

 기억으로부터 나는 지금 시속 몇 킬로의 속도로 달아나고 있는 중일까

발 없는 말을 타고서야 나는 낙원이 발잔등 위를 스쳐 갔다는 걸 알았구나

 

 


 

이인서 시인

1959년 전남 영광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불문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15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말이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