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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현경 시인 / 모국어 물소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7.

이현경 시인 / 모국어 물소리

 

 

빗소리가

기다려지는 날

 

싱크대의

스테인리스 판위에 떨어지는

물줄기의 난타

 

포도가 씻겨내려가고

복숭아 피부의 솜털이 떠내려간다

 

물소리를 들을 때마다

냇가 여울목 앞에 와있는 것 같다

 

비 오는 날에는

두 개의 물소리가 화음을 만들어

 

음표들이 피아노 건반에 스며든다

 

손가락 사이로 무성하게 젖는 소리

생의 매듭도 물에 풀어서 같이 흐를 수 있다면

 

물방울이 살아서 손가락에 매달린다

이런 것이 오랫동안 동거한 정이었던가

 

정수기에서 들려주는

색다른 낙숫물 소리

 

새벽, 생수가 입술을 애타게 부른다

 

빗방울이 잎사귀에 매달리듯

목마른 혓바닥에 얹히는 해갈

 

뿌리 끝이 하얀

모국어의 물소리가 찰찰 떨어진다

 

물소리의 장르들

 

이 새벽 누군가, 갈증을

지우고 있다

 

 


 

 

이현경 시인 / 그대 떠난 뒤,

 

 

바람은

꽃이 외로울 때 얼굴을 내민다

 

환한 언어를 나누어주는

나지막한 꽃의 고요가 일렁인다

 

너도 속을 벗겨보면

나처럼 애잔한 그리움이 있구나

 

내게서 떨어져 나간 그대는 아득한데

떠난 이유가 문득, 꽃잎에 앉아있을 것 같아

이토록 꽃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나무에도 꽃지는 이별이 있듯이

 

내 이별의 아픔도

꽃처럼 곱게 떨어뜨릴 수 있을까

 

앉았다 떠나는 분홍 공기처럼

그대 떠난 뒤, 꽃이 모두 그대 같아

 

눈물이 되기 전에

바람의 음성이 테두리를 치고

내 안의 깊은 공터에 꽃의 향기를 담는다

 

내 마음을 아는 화심

포옹하고 싶은 너를 젖은 눈으로 오린다

 

 


 

이현경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20년 《시현실》로 등단. 시집으로 『허밍은 인화되지 않는다』, 『맑게 피어난 사색』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