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영 시인 / 역병
새장 속 앵무새를 길들이는 것이다 긴 팔과 짧은 팔이 계절을 잃는 것이다 우리들은 말도 안 되는 마스크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노인들은 오래전 경험한 역병의 기억을 치매와 치마의 오해로 혼돈하는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치마 속에서 치매를 감추기도 하는 것이다 늘 다니던 거리가 욱신욱신 아파오는 것이다 밤새 뜯어먹던 골목길을 빠져나오는 것이다 가늘고 긴 문장들 입 안의 세 치 혀를 꺼내는 것이다 입구를 찾지 못한 단기기억이 울음을 삼키는 것이다
-시집 『브로콜리 마음과 당신의 마음』
강미영 시인 / 비와 모과 사이 눈처럼 내려
모과를 떠올리고 먼 새로운 행성을 그려본다
모과는 모자가 아니었다 당신은 내가 될 수 없으니 내가 갈게
진실은 언제나 미궁 속으로 숨어버리고 얼굴은 모과 색으로 딱딱해지거나 키스로 향긋하지
비가 눈과 같이 내려 모과는 모자가 될 수 없다는 걸 목요일에 알았다 시(詩)는 벼랑에서 만나야 한다 골목은 길었고 우리는 길을 잃었다
모두가 혼자 떠나야 하는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걸까 정답은 꼭 가슴에 발목을 심은 후 알게 되는 것 모과는 향이 특별해서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걸 절대 잊을 수 없다는 걸
오늘은 비가 눈과 같이 내려 모자는 모과가 아니었다
-시집 『브로콜리 마음과 당신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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