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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미영 시인 / 역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7.

강미영 시인 / 역병

 

 

 새장 속 앵무새를 길들이는 것이다 긴 팔과 짧은 팔이 계절을 잃는 것이다 우리들은 말도 안 되는 마스크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노인들은 오래전 경험한 역병의 기억을 치매와 치마의 오해로 혼돈하는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치마 속에서 치매를 감추기도 하는 것이다 늘 다니던 거리가 욱신욱신 아파오는 것이다 밤새 뜯어먹던 골목길을 빠져나오는 것이다 가늘고 긴 문장들 입 안의 세 치 혀를 꺼내는 것이다 입구를 찾지 못한 단기기억이 울음을 삼키는 것이다

 

-시집 『브로콜리 마음과 당신의 마음』

 

 


 

강미영 시인 / 비와 모과 사이 눈처럼 내려

 

 

모과를 떠올리고

먼 새로운 행성을 그려본다

 

모과는 모자가 아니었다

당신은 내가 될 수 없으니

내가 갈게

 

진실은 언제나 미궁 속으로 숨어버리고

얼굴은 모과 색으로 딱딱해지거나 키스로 향긋하지

 

비가 눈과 같이 내려

모과는 모자가 될 수 없다는 걸

목요일에 알았다

시(詩)는 벼랑에서 만나야 한다

골목은 길었고 우리는 길을 잃었다

 

모두가 혼자 떠나야 하는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걸까

정답은 꼭 가슴에 발목을 심은 후 알게 되는 것

모과는 향이 특별해서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걸

절대 잊을 수 없다는 걸

 

오늘은 비가 눈과 같이 내려

모자는 모과가 아니었다

 

-시집 『브로콜리 마음과 당신의 마음』

 

 


 

강미영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04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Y는 느티나무』(시와세계, 2014)와 『브로콜리 마음과 당신의 마음』(시인동네, 2021)가 있음. 제7회 시와세계 작품상 수상. 『시와 세계』 편집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