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옥엽 시인 / 수(壽)
숟가락에 글자 하나 걸려 있다 꽃 모가지 허공에 걸리듯 대롱대롱 걸려 있다
해서체의 목숨壽
숟가락이 곧 목숨이란 말인가 숟가락에 목숨이 달려있단 말인가
이승에 와서 맨 처음 만나 뜨거운 입맞춤 거듭하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갈라서는
수시로 긴밀히 접촉하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거의 없는
하나 가만히 되짚어보면 생사를 가리는 척도가 된 지 오래인
이 세상 누구보다 큰일을 하고 있는, 큰 말을 하고 있는
우리 역사가 진행 중인 숟가락 하나 우리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숟가락 하나
지나온 생 돌아다보듯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시집 『불멸의 그 여자』 2021년 포지션
조옥엽 시인 / 너에게 쓰는 편지
가버린 날들은 모두 봄날이었다는 말, 귀 밖으로 흘려들으며 살았다
복잡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내가 나를 놓아버린 순간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어렵사리 눈을 떴을 땐 이미 어제의 나는 없었고
근심의 강물에 얼굴을 담근 네가 오늘의 나를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나뭇가지처럼 사지가 굳어버린 나는 이미 사람이 아니었으나 더욱더 사람이고 싶은 날들이 계속되고 그럴수록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불행했다고도 할 수 없는
바람의 애무를 받으며 가로수 길을 걷던 평범한 날의 자투리 여유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너는 나를 살리려 기를 쓰며 너의 모든 걸 걸고, 나는 내가 날마다 다른 방향으로 치솟는 절벽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럴수록 애먼 길로 빠져나가려 용을 쓰는 지옥 같은 시간이 이어지고
네 몸피의 두세 배는 되는 날 욕조에 넣고 낑낑대는 너의 콧등에 맺힌 땀과 상기된 얼굴을 곁눈으로 훔쳐보며 이제는 거두어들였으리 어림짐작했던 지난밤의 희망은 오늘도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나는 네가 하는 일들이 어쩌면 이생에서 너와 나 사이에 낀 해묵은 때를 지우고 다시 곱게 피어나고 싶다는 열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매 순간 욕조에 둥둥 떠다니는 비누 거품처럼 조그맣고 하얀 거품 속으로 숨어들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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