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숙영 시인 / 줄다리기 닫혔던 아지트에 불이 켜졌어요 같은 길을 오가며 암흑 속의 움직임을 주시했죠 밀크티가 달지 않아 입맛에 딱 맞고, 딱딱한 의자가 불편하지 않아요 천만다행으로 천장은 무너지지 않았고, 모녀의 사투리는 암호처럼 들려오네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디저트로 하루를 마감해요 크리스마스트리는 검색에서 롱 패딩에 밀렸대요 안은 바깥에, 아래는 위에, 빛은 어둠에 밀려 힘을 쓰지 못해요 간판이 없어도 간판에 밀리지 말아요 몇 발의 뒷걸음질은 익숙한 전략이죠 정직한 양과 깊숙한 볼우물의 힘으로 자, 영혼을 끌어 모아 힘껏 당겨요 계간 『시작』 2022년 봄호 발표
홍숙영 시인 / 낮달
낮은 숨어 있기 좋은 시간, 민낯을 내밀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별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니 한숨 돌릴 수 있다
반짝이는 것들만 남아 있는 11층, 유리창에 비친 당신의 두 눈동자도 촛불처럼 흔들리며 빛난다
희붐해지는 바깥을 닦으면 저절로 맑아지는 안, 지워지고 싶다면 중력을 거슬러 벽을 타고 오르면 돼
커다란 호주머니에 손을 감추고 다니던 아버지는 인쇄소 사장이 도망 갔다고 울상을 지었다 손가락 두 마디를 바친 일터가 사라지자 우리의 먹을거리도 동이 났다 뒤적여도 잡히지 않는 허공의 새를 향해
총을 겨누거나 붕어빵을 구우려면 손놀림이 민첩해야지 풍경을 옮기려면 손가락의 도움이 필요한데 점점 작아지는 아버지의 창, 닳아지는 끝
아버지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몸속에 서늘한 돌이 굴러다녔고 핏발 서린 언어들이 소란을 부렸다, 이윽고
난이도 높은 기술을 선보여야 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무대에 잠시 바람이 스쳤고 그 순간 신이 우리 곁을 지나갔을지도 모르지
꼭꼭 숨지 않아도 투명해지는 11층, 보이지 않게 서서히 탯줄을 풀자 쑥부쟁이처럼 자라나는 손가락 두 마디
선명해지는 낮이 뭉툭한 끝을 갈아낸다
계간 『사이펀』 2022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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