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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주송 시인 / 식물성 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8.

이주송 시인 / 식물성 피

버려진 차의 기름통에선

몇 리터의 은하수가 똑똑 새어 나왔다

빗물 고인 웅덩이로 흘러 들어가

한낮의 오로라를 풀어 놓았다

그러는 사이 플라타너스 잎들이

노후된 보닛을 대신하려는 듯

너푼너푼 떨어져 덮어 주었다

칡넝쿨은 바퀴를 바닥에 단단히 얽어매고

튼실한 혈관으로 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햇빛과 바람, 풀벌레와 별빛이 수시로

깨진 차창으로 드나들었다

고라니가 덤불을 헤쳐 놓으면

그 안에서 꽃의 시동이 부드럽게 걸렸다

저 차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식물성 공업사에 수리를 맡긴 것이다

그래서 소음과 매연과 과속으로 탁해진

그동안의 피를 은밀히 채혈하고

자연수리법으로 고치는 중이다

풀잎 머금은 이슬로 투석마저 끝마치면

아주 느린 속도로 뿌리가 생기고

언젠가는 차의 이곳저곳에 새들도 합승해,

홀연 질주 본능으로 기슭을 배회하다가

봄으로 감쪽같이 견인될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효율성 좋은 자동차라고

차 문을 열거나 지붕 위에서 뛰기도 하지만

계절의 시속으로 함께 달리는 중이라는 걸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금도 차 주위로

푸릇한 수만 개의 부품이 조립되고 있다

-시집 『식물성 피』 걷는사람, 2022.

 

 


 

 

이주송 시인 / 안착

 

철퍼덕, 주저앉은

한 무더기의 소똥

이렇게 아름다운 안착이 있을까요

 

​소의 근력으로 초록을 모두 탕진한

소용을 다 바치고 난 뒤의 표정

제가 가진 본성과 중력이

가장 평온한 모습으로 내려앉은

착지

 

​모든 힘이 털렁 빠져나온 저 똥에는

초식의 감정과 순경順境이 있습니다

막 도착한 순하디순한 온기에는

풀 속에 밴 이슬도 살아 있어

김이 사리질 때까지 경건해집니다

 

​자욱한 안개가 쟁기와 보습을 끌고

어기적어기적 새벽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산밭이 꺼벅거리며 축축한 등을 내밉니다

 

​소는 거친 콧김을 내뿜다가

꼬리 흔들어 고요를 쫓습니다

주인은 워워 한 박자 쉬며

언덕 아래 풍경을 되새김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연꽃 송이 같은 소똥

좌선을 다 끝내고 나면

한 움큼의 풀씨 경전이 되겠지요

 

-시집 『식물성 피』 2022. 걷는사람

 

 


 

이주송 시인

1961년 전북 임실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20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첫시집 『식물성 피』(걷는사람, 2022). 2019 제7회 평택 생태시문학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