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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숙영 시인 / 줄다리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8.

홍숙영 시인 / 줄다리기

닫혔던 아지트에 불이 켜졌어요

같은 길을 오가며 암흑 속의 움직임을 주시했죠

밀크티가 달지 않아 입맛에 딱 맞고, 딱딱한 의자가 불편하지

않아요

천만다행으로 천장은 무너지지 않았고,

모녀의 사투리는 암호처럼 들려오네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디저트로 하루를 마감해요

크리스마스트리는 검색에서 롱 패딩에 밀렸대요

안은 바깥에,

아래는 위에,

빛은 어둠에 밀려 힘을 쓰지 못해요

간판이 없어도 간판에 밀리지 말아요

몇 발의 뒷걸음질은 익숙한 전략이죠

정직한 양과 깊숙한 볼우물의 힘으로

자, 영혼을 끌어 모아 힘껏 당겨요

계간 『시작』 2022년 봄호 발표

 


 

 

홍숙영 시인 / 낮달

 

 

낮은 숨어 있기 좋은 시간, 민낯을 내밀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별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니 한숨 돌릴 수 있다

 

반짝이는 것들만 남아 있는 11층,

유리창에 비친 당신의 두 눈동자도 촛불처럼 흔들리며 빛난다

 

희붐해지는 바깥을 닦으면 저절로 맑아지는 안,

지워지고 싶다면 중력을 거슬러 벽을 타고 오르면 돼

 

커다란 호주머니에 손을 감추고 다니던 아버지는 인쇄소 사장이 도망 갔다고 울상을 지었다

손가락 두 마디를 바친 일터가 사라지자 우리의 먹을거리도 동이 났다

뒤적여도 잡히지 않는 허공의 새를 향해

 

총을 겨누거나 붕어빵을 구우려면 손놀림이 민첩해야지

풍경을 옮기려면 손가락의 도움이 필요한데

점점 작아지는 아버지의 창, 닳아지는 끝

 

아버지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몸속에 서늘한 돌이 굴러다녔고

핏발 서린 언어들이 소란을 부렸다, 이윽고

 

난이도 높은 기술을 선보여야 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무대에 잠시 바람이 스쳤고 그 순간 신이 우리 곁을 지나갔을지도 모르지

 

꼭꼭 숨지 않아도 투명해지는 11층,

보이지 않게 서서히 탯줄을 풀자 쑥부쟁이처럼 자라나는 손가락 두 마디

 

선명해지는 낮이 뭉툭한 끝을 갈아낸다

 

계간 『사이펀』 2022년 봄호 발표

 

 


 

홍숙영 시인

이화여대 졸업. 프랑스 파리2대학교 언론학 석사, 커뮤니케이션 박사. 2002년 『현대시문학』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슬픈 기차를 타라』와 그밖의 저서로는 『창의력이 배불린 코끼리』 『스토리텔링 인간을 디자인하다』 『생각의 스위치를 켜라: 창의적인 글쓰기 프로젝트』 등이 있음. 현재 한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