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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금란 시인 / 수면내시경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9.

금란 시인 / 수면내시경

 

 

침대 위에 빈 몸을 널어놓은 채

잠시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를 밀어냈던 얼굴들이 흔들렸다 사라진다

고깃덩이로 누워있는 몸속을 샅샅이 훑고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를 어렴풋이 들은 듯하다

 

물속 들여다보듯 내 속을 빤히 보고 있는 저들

동백꽃 같은 혹이 자라고 있지는 않을까

몰래 삼켜 버린 꽃씨 하나가 알 수 없는 자리에서 꽃을 피우고

화면 가득 붉은색으로 물들 때

가장 짧은 천국의 거짓말을 알게 될 것이다

 

사과 속 벌레가 사과를 검게 하듯

소화되지 못한 혹의 침묵이 장기에 그늘을 드리우고

나를 날마다 갉아먹고 있는 위독한 침묵을

 

생의 절반을 계단 모서리를 접으며 살고 싶지 않는

눈꺼풀이 모르게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일어나세요

금속성의 말이 귀에 부딪힐 때

나는 가장 캄캄한 우주를 헤매고 있었다는 거다

 

―시집 『얼굴들이 도착한다』(파란, 2019)

 

 


 

 

금란 시인 / 좋은 이웃의 법칙

 

코끼리 발걸음으로 걷는 당신과

음계 빠진 피아노를 쳐대는 당신의

깊은 슬픔을 알 수 없어

조금씩 균열이 가는 벽을 붙잡고 서있다

앞과 뒤의 온도가 다른 방에서

피아노를 매달고 걷는 코끼리 발목을 상상하면서

유리로 만든 드레스를

입었다벗었다 입었다벗었다

들리지 않는 것들에 대한 추억이 절실해지는 밤에

책상 위를 굴러다니는 글자들을 주워 모은다

최대한 우아하게 웃을 수 있는데

당신의 뒤통수에서 익숙한 소리가 떨어지고 만다

창문에 걸린 별을 뚝 잘라주며

오래오래 함께 살아요 라고 말하려다

차라리 얼굴을 몰라 반가운 이웃과 사촌 사이

밤마다 소리 지르는 토끼가 하얗게 쌓인다

포개지거나 무너지면 뛰쳐나와

제일 먼저 코끼리 발목 찾기

피아노 치는 손가락 찾기

오늘은 친해지고 싶어

코끼리 발목에 좋아요를 누르고 나니

눈치 빠른 엘리베이터가 내려온다

​​

계간 『딩하돌아』 (2020년 봄호)

 

 


 

금란 시인

1965년 전북 순창에서 출생. 2013년 《시로 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얼굴들이 도착한다』(2019 파란). 전자시집 <나는 마녀가 아니예요>가 있음. 편두통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