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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윤서 시인 / 0시의 전봇대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9.

정윤서 시인 / 0시의 전봇대

 

 

 섬과 섬 사이 세븐일레븐이 있고 소 한 마리가 온전히 걸어 들어가 앉아 있는 신선 설농탕집이 있고 섬과 섬 사이를 킁킁거리며 떠도는 떠돌이 개가 섬 한구석에 오줌을 갈기고 짐 자전거와 꼬마 오토바이는 갸우뚱 그 꼬라지를 말없이 지켜보고

 

 뒤룩뒤룩 살이 쪄야 하는 지상과제를 완수한 돼지가 저 시장 어귀 순대 집에 내장을 몽창 쏟아놓고는 갈빗집 주방에서 해체된 육신으로 자빠져 있고 소란스런 오리들이 소란스런 주둥이를 버린 채 오리구이 집에서 헛물을 켜고 있고 서리보다 더 무서운 왕소금에 백기투항 해 버린 배추가 숨을 막 버리는 중이고 몸뚱이  털을 기계에 몽창 내어준 닭들이 기름에 튀겨지고 또 튀겨지는 삼식이 치킨집이 있고 세탁소 다림질하는 유리 창가에서 고요한 파문을 물고 비늘처럼 흩어지는 물방울이 있고 섬과 섬 사이에 얽히고설킨 곳에 날아와 파수꾼처럼 모가지를 훽가닥 훽가닥 돌리며 조잘대는 새들이 있고 골목 쓰레기 더미에 라이터 불을 붙이며 지나가는 취객이 있고 그 뒤를 따라 서로 헛 주먹질하는 배 나온 중년의 사내들이 어기적 어기적 거리다 쓰러져 버리고

 

 자정이 되어서야 해사한 눈썹을 배시시 보이는 초승달 아래 쓰레기봉투를 청소차에 집어 던지는 지친 어깨의 청소부가 있고 새벽녘 낯선 도시에 떨어져 반은 장님인 것처럼  모든 골목을 하악 하악 대는 털 곧추선 고양이처럼 된장국 보글보글  끓고  있는  어느 반지하 창가에서 방문 삐걱거리는 소리 들으며 크르릉 크르릉 거리기도 해 보고

 

 사실 무서운 것은 저 막다른 골목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그 사람이고 골목을 따라 흘러갔다 흘러나온 젖은 사내들 검 은 웃음에 섬이 무너져 순식간 일대가 암흑의 바다로 변신하는  것이고 그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신경쇠약에 걸린 나만의  바다에  아무도  들일 수  없는 것이고 섬 그림자마저 무서워 차라리 사람 없는 곳이 마음 제일 편한것이고 그럴수록 부스러기 껍데기만 휑하니 숙명처럼 자꾸만 자라는것이고 결코 방파제 넘어 저 파도에 평생 닻을 내릴 수 없는 것이고

 

웹진 『시인광장』 2022년 12월호 발표​

 

 


 

정윤서 시인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2020년 《미네르바》 등단.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