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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은령 시인 / 법칙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9.

김은령 시인 / 법칙

 

 

치자꽃나무가 죽었다

내가 약간의 풍요와 약간의 오만과

약간의 관계들로 이루어진 숲에서

간벌 되어

단칸방으로 밀려날 때

얼렁뚱땅 화분으로 옮겨져

따라온 치자꽃나무

죽었다!

저 나무 화분 속 팽팽하게 뿌리 뻗어

눈 오는 날에도

빳빳하게 푸른 잎 세우고선

살아있다고 대들던 놈이었는데

나 또한 저 놈의 눈치 보느라

살아있음에서 부동의 자세로 견디어야 했는데

이젠 저도 인정한 거다

뿌리의 집이었던 화분이 실은

뿌리의 감옥이었다는 거,

깨트릴 수 없다면, 벗어날 수 없다면

결코 대지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김은령 시인 / 주술에 걸린 밤

 

 

내가 아는 살구목지 시인은

카카오톡 배경으로

사위가 켜주는 라이터 불에 바짝 얼굴을 대고

담배 한 모금 빨아들이시는

늙은 아버지 사진을 모셔놓고

 

'좀 더 평안하시길 빕니다.'라는

 

문구를 걸어 놓았다

수없이 카톡질을 해왔으면서

오늘 봤다

 

배경은 언제나 숭고인 것,

 

그 아버지 정신까지 놓쳐버려

불안과 평안의 경계, 모호한지 오래인데

얼마나 간절한 진언이면

생면부지 나를 한밤중에 벌떡 일으켜

다시 보고,

또 보게 하나

 

《다층》2020. 여름호

 

 


 

김은령 시인

1961년 경북 고령에서 출생. 1998년 계간 《불교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통조림』 『차경借憬』 『잠시 위탁했다』가 있음. 현재 대구작가회의 이사로 활동 中. 계간 <사람의 문학>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