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규정 시인 / 쓸만한 녀석
외로워라 물풀에 기댄 바위
우등상은 감히 엄두도 못내고 보리피리 꺾어 불며 개근하던 녀석 밥 굶고 학교에 가서 청소당번이나 되던 녀석 여자 짝궁과 사진 한 장 못 찍어 본 녀석 국방부 홍보영화를 보러가서 죽어라 박수치던 녀석 정보병과로 군대에 가서 소총수로 끝낸 녀석 넥타이 메고 공장으로 가며 만면에 웃음을 띠던 녀석 연탄가스를 마시고 출근하다 쓰러진 녀석 파업에 동참도 못하고 덩달아 해고된 녀석 배 타라 가서 체격이 작다고 툇짜 맞은 녀석 친구의 여자 심부름이나 해주는 녀석 이렇다할 하이 라이트가 없는 신비한 녀석 밋밋한 생활의 연속에서도 왜 대체 혼절하지 않나 오히려 맑은 정신으로 너무 멀리까지 왔다 그리워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그 사내
-시집 『직녀에게』
서규정 시인 / 길을 황야를 위해 멀다 최영철에게
그대 왜 내가 가끔 야수로 돌변하는지, 광기와 폭력의 날들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 참 어처구니 없는 푸악이 계속되고 있었네 누구 하나 이겨 본 적이 없이 깨지고 꺾이며 터진 상처에 의한 상처의 검붉은 이름을 몰라 나는 헤매인다네 길은 황야를 위해 울고, 황야는 정거장의 것인데 어제도 중앙둥 주막에서 까닭없이 목에 걸리던 가시 엿가락처럼 비틀린 내장에서 입 밖으로 기어나온 줄기가 글쎄 경부선 레일보다 긴 그 욕망의 꽃
-시집 『직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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