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령 시인 / 법칙
치자꽃나무가 죽었다 내가 약간의 풍요와 약간의 오만과 약간의 관계들로 이루어진 숲에서 간벌 되어 단칸방으로 밀려날 때 얼렁뚱땅 화분으로 옮겨져 따라온 치자꽃나무 죽었다! 저 나무 화분 속 팽팽하게 뿌리 뻗어 눈 오는 날에도 빳빳하게 푸른 잎 세우고선 살아있다고 대들던 놈이었는데 나 또한 저 놈의 눈치 보느라 살아있음에서 부동의 자세로 견디어야 했는데 이젠 저도 인정한 거다 뿌리의 집이었던 화분이 실은 뿌리의 감옥이었다는 거, 깨트릴 수 없다면, 벗어날 수 없다면 결코 대지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김은령 시인 / 주술에 걸린 밤
내가 아는 살구목지 시인은 카카오톡 배경으로 사위가 켜주는 라이터 불에 바짝 얼굴을 대고 담배 한 모금 빨아들이시는 늙은 아버지 사진을 모셔놓고
'좀 더 평안하시길 빕니다.'라는
문구를 걸어 놓았다 수없이 카톡질을 해왔으면서 오늘 봤다
배경은 언제나 숭고인 것,
그 아버지 정신까지 놓쳐버려 불안과 평안의 경계, 모호한지 오래인데 얼마나 간절한 진언이면 생면부지 나를 한밤중에 벌떡 일으켜 다시 보고, 또 보게 하나
《다층》2020.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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