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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우성 시인 / 무럭무럭 구덩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1.

이우성 시인 / 무럭무럭 구덩이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눈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쑥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이우성 시인 / 슬픔의 거리를 지나는 바람을 납득시키기 위해

 

 

돌아오는 시작엔 흐름에서 만나

느리고 약한 방

미래에 가 있는 바위들

사실은 바람들, 이라고 적으려고 했는데

굴러가버렸네

 

종이 위에 누워 냇가와 별을 떠올린다 나는 선이거나 선을 그은 사람

의미 없음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형태 가운데로 박수를 치며 누군가는 사라지는, 이라고 적을 테지만

 

새는 들판이 반사하는 빛

단어는 새가 증명하는 단호함

 

나는 따라서 웃는 소년 무리들

사라져버린 지 오래 되었는데

아무래도 웃다가 펑 터져버린 것은 아닐지

 

거리의 고요가 불안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리고 뭐든 자주 읽으면 아름다운 순간만 기억에 남는다

강물은 일러준다

흘러가는 것을 보면 망연해지는 거

기적의 기록 같은 거

 

내가 슬픔이었을 때 너는 재미있는 아이였던

 

 


 

이우성 시인

1980년 서울 출생.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나는 미남의 나라에서 왔어』(문학과지성사, 2012), 『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 현재 <ARENA>의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