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희 시인 / 손톱
핏길, 걸쭉한 용액이 주춤주춤 흘러가요 시들해진 달
렌즈초점을 맞추고 집중할 때 들린답니다 사랑스런 아메바의 속삭임 나를 어떻게 읽었나요 렌즈로 보이는 것은 진리일 수도 있고 허상일 수도 있는데, 쥬라기에 깨진 공룡알 조각들 흩어져 왔어요 말하는 아메바처럼 자웅동체 인간을 만들어버리면 헤어진 것들이 만나 전율하는 기쁨은? 멀리 돌아온 핏길, 쥬라기부터 지금까지 얽힌 손가락 이제 풀고 싶은가요 팽창했던 달 응어리 녹아 흘러 우주의 손톱이 빠져나가요 쪼개진 알 조각들 사랑스런 아메바, 갈라진 피의 길을 타고 와서
몇 개의 달로 분열할까요 누구의 손톱으로 자라날까요
-시집 『악어야 저녁 먹으러 가자』
배성희 시인 / 리듬의 발견
비포장 낯선 길 타는 냄새가 나요 소리를 질러도 텅 빈 버스는 달려, 가속페달에 힘을 주고 놈은 퀵퀵, 튕겨나간 고슴도치들 온 방을 쏘다니고 가위눌려 볼 때마다 세 시 아침은 멀었는데 미친 버스는 멈추지 않아 아토피 살을 긁어 대지말란말이야
퀵퀵 달아오른 놈이 몰고 오는 지진, 허리케인을 믿지 않아 부풀어 초조한 풍선들 펑, 터져도 쏟아져도 외면할 거야 반짝이 색종이 대신 무엇이 척추를 무너뜨릴지 무엇이 타오를지 난 알아, 놈은 퀵퀵 나는 슬로우 얼마나 간절한가 내가 움켜쥔 것이 놈의 손가락이기를 머리카락이기를
나의 리듬을 존중한다고? 풀어지지 않으려 단단히 감긴 테이프, 슬로우 숨결을 가다듬지 나의 엔진은 달려도 과열은 없어 쇠바퀴에 채이는 돌조각처럼 놈의 속도가 유리창을 깨부순다 해도 주먹 쥐고 앙다문 내 입술이 죽어도
기억해, 우리는 계속 따로 간다는 것을
팽팽한 가죽에 갇힌 맹수의 발톱 할퀴어대지만 나에겐 너무 소중한 놈 완벽하게 질긴 가면을 쓰고 매캐한 연기만 피우는 희나리 어긋나는 리듬이야
-시집 『악어야 저녁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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