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엽 시인 / 그릇에 관한 명상
흙과 물이 만나 한 몸으로 빚어낸 몸 해와 달이 지나가고 별 구름에 새긴 세월 잘 닦인 낡은 그릇 하나 식탁 위에 놓여있다
가슴에 불이 일던 시절인들 없었으랴 함부로 부딪혀 깨지지도 못한 채 숨 막혀 사려 안은 눈물, 붉은 기억 없었으랴
내가 너를 사랑함도 그릇 하나 갖는 일 무형으로 떠돌던 생각과 느낌들이 비로소 몸 가라앉혀 편안하게 잠이 들 듯
모난 것도 한 때의 일 둥글게 낮아질 때 잘 익은 달 하나가 거울 속으로 들어오고 한 잔 물 비워낸 자리, 새울음이 빛난다
이지엽 시인 / 갈대는 몸으로 울지 않는다
갈대는 몸으로 울지 않는다 길들이 길을 잃어버리는 바다에 와서 더는 잃어버릴게 없는 갈대는 가늘어져 끊어질 듯한 영혼의 쓰라림으로 운다 스삭스삭 마른 손을 비비는 갈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고개를 주억이며 몸을 버리고 이윽고 물의 뼈들만 일으켜 세워 정직하게 겨울을 맞는다 나는 왜 몸 가린 채 비스듬히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일까 이게 나야 손바닥 쫙 펴보지도 못하고 어쩌자고 더는 사랑에 아파하지도 않고 집도 달도 다 잊어버리고 그러나 보아라 지금 바다와 갈대밭은 한 몸이다 은빛이다가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저 황홀하고 쓸쓸한 순종 갈대의 풋내 나는 울음도 겨울이 깊어갈수록 솜털 같은 흰 울음으로 바꾸어지지 않더냐 그렇게 혼자 아파할 일이 아니라고 바람이 밀치는 듯 갈대의 어깨를 자꾸 쓰다듬어준다 필시 저 부드러운 개펄 어딘가 엔 망둥어와 갯지렁이가 집을 짓고 있으리라 어디서 바람은 은은히 다시 살아나서 뭍으로 불어오는 걸까 새떼는 일제히 날아오르며 바람의 뒤끝을 예리하게 좇고 있다 이제 눈을 뜨기에도 어려운 눈부신 노을, 그 부석의 시간 해가 바다의 자궁 초입에서 오래 오래 뜨겁다
이지엽 시인 / 아름다움의 한 가운데
마른 땅위에 한나절 비가 내리고 트랙터 지나간 뒤 깊게 파인 바큇자국들!
세상의 모든 길들은 상처가 남긴 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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