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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혜 시인 / 투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1.

김지혜 시인 / 투신

 

 

비닐하우스 문을 열자

백일몽의 냄새가 와락 덮쳐들었어

여름 햇살 뜨겁던 정오였지

글라디올러스, 대쪽 같은 잎새 사이로

밀어올리는 연분지 같은 속살

몽울들은 채 열려있지 않았지만

훅 냄새를 피워 올렸어 숨어 있던 냄새

혓바닥의 돌기처럼 시뻘건 냄새

그 열탕 같은 곳에서 종일 몸이 달았던 거야

누군가 다가와 자신의 기다란 목을

물어뜯고 싹둑 베어가 주길

노오랗게 익어 가는 몸뚱이를 한바탕

내동댕이치고 질끈 눈 감게 되길

그 펄펄 끓어 넘치던 곳

어디에도 출구 없던 곳

비닐하우스 문을 열자

오래된 감옥의 냄새가 훅 끼쳐왔어

여름 햇살 뜨겁던 정오였지

너무 오래 다물고 있어 썩은 단내처럼

빠져나오는 꽃들의 깊은 한숨소리

채 익지 않은 푸른 몽울에서 새나왔지만

늙어버린 香 가득했어

분분히 흩날리며 고꾸라질

연분홍 시간의 입술

 

-시집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2006년 열림원

 

 


 

 

김지혜 시인 / 물결

 

 

물결은 가슴에서 인다

듣는 자의 마음에서 인다

눈을 감아도 파도소리 한가득

먼 고장 해변가 낯선 방에서

수녀도 비구니도 아닌 여자가

순례의 한 생을 끌어안고 눕는다

귀를 막아도 파도소리 한가득

물결은 가슴에서 몰려와

가슴으로 돌아가고

마침내 여자도 남자도 아닌 존재가

가슴속 오래된 홀 뚜껑을 열고

물결로 사라진다

 

 


 

김지혜 시인

1976년 서울 출생.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 동대학원에서<한국의 근현대문학>을 공부. 200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이층에서 본 거리> 시 당선. 시집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