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혜 시인 / 투신
비닐하우스 문을 열자 백일몽의 냄새가 와락 덮쳐들었어 여름 햇살 뜨겁던 정오였지 글라디올러스, 대쪽 같은 잎새 사이로 밀어올리는 연분지 같은 속살 몽울들은 채 열려있지 않았지만 훅 냄새를 피워 올렸어 숨어 있던 냄새 혓바닥의 돌기처럼 시뻘건 냄새 그 열탕 같은 곳에서 종일 몸이 달았던 거야 누군가 다가와 자신의 기다란 목을 물어뜯고 싹둑 베어가 주길 노오랗게 익어 가는 몸뚱이를 한바탕 내동댕이치고 질끈 눈 감게 되길 그 펄펄 끓어 넘치던 곳 어디에도 출구 없던 곳 비닐하우스 문을 열자 오래된 감옥의 냄새가 훅 끼쳐왔어 여름 햇살 뜨겁던 정오였지 너무 오래 다물고 있어 썩은 단내처럼 빠져나오는 꽃들의 깊은 한숨소리 채 익지 않은 푸른 몽울에서 새나왔지만 늙어버린 香 가득했어 분분히 흩날리며 고꾸라질 연분홍 시간의 입술
-시집 <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2006년 열림원
김지혜 시인 / 물결
물결은 가슴에서 인다 듣는 자의 마음에서 인다 눈을 감아도 파도소리 한가득 먼 고장 해변가 낯선 방에서 수녀도 비구니도 아닌 여자가 순례의 한 생을 끌어안고 눕는다 귀를 막아도 파도소리 한가득 물결은 가슴에서 몰려와 가슴으로 돌아가고 마침내 여자도 남자도 아닌 존재가 가슴속 오래된 홀 뚜껑을 열고 물결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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