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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라라 시인 / 우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2.

최라라 시인 / 우화

당신에게 길을 묻고 싶은데 할 수 없어서

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과 놀이공원에 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여우와 갔습니다

당신과 영화를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이구아나와 봤습니다

당신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살쾡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한 번도 당신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난 어느 것도 당신 아닌 것은 없었습니다

어떤 날은 당신을 만나고 왔다 생각했는데

그 순간의 나는 나도 모르는 나였습니다

 

-시집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는다』

 

 


 

 

최라라 시인 / 누가 내 귀고리를 장물이라고 한다

​아직 기억하고 있어, 그와의 일박

면도한 다음 날의 턱과

겨드랑이 속

젖은 새의 깃털

혼잣말인 듯

신라적 어느 왕이라고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

분을 바르듯 스치던 손길,

오래 기다렸던 건 아침이 오지 않은 아침

사랑이 뭐 별거겠니,

명자나무 잎사귀만 한

금쪽 귀고리 하나 달고 다니는 일일뿐인 걸

고분 사이를 지날 때면 자꾸 귀를 만지게 돼

그가 정말 나에게 왔다 갔을까

-시집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는다』

 

 


 

최라라 시인

1969년 경주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1년 《시인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는다』(천년의시작, 2017)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