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라라 시인 / 우화 당신에게 길을 묻고 싶은데 할 수 없어서 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과 놀이공원에 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여우와 갔습니다 당신과 영화를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이구아나와 봤습니다 당신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살쾡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한 번도 당신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난 어느 것도 당신 아닌 것은 없었습니다 어떤 날은 당신을 만나고 왔다 생각했는데 그 순간의 나는 나도 모르는 나였습니다
-시집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는다』
최라라 시인 / 누가 내 귀고리를 장물이라고 한다 아직 기억하고 있어, 그와의 일박 면도한 다음 날의 턱과 겨드랑이 속 젖은 새의 깃털 혼잣말인 듯 신라적 어느 왕이라고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 분을 바르듯 스치던 손길, 오래 기다렸던 건 아침이 오지 않은 아침 사랑이 뭐 별거겠니, 명자나무 잎사귀만 한 금쪽 귀고리 하나 달고 다니는 일일뿐인 걸 고분 사이를 지날 때면 자꾸 귀를 만지게 돼 그가 정말 나에게 왔다 갔을까 -시집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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