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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민 시인 / 11월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2.

허민 시인 / 11월

 

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했어, 그럴 때 일상은

급하게 멈춰서는 느낌

병든 나비들의 주검 같은

누런 은행잎들 거리에 툭툭 떨어지며

쌓이고 있던 11월 가을 아침

한 사람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

결국 집을 나섰고 차를 몰았어

사과는 빨리 해야 하는 것인지, 혹은

뒤늦게 거리를 두고라도 해야 하는지

그런 생각에 골몰하다가 골목 교차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지

미처 보지 못한 보행자가 나타났고

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별일 아니라는 듯

아니 내게 몇 마디 중얼거리고는

금세 골목에서 멀어져 갔어

어디에 급히 몸을 부딪혔는지 모르나

내 손톱 하나가 깨져 있었지

미처 자르지 못한 긴 손톱이 종이 찢어지듯

함부로 그렇게 갈라져 찢겨나갔어

나는 그래도 늦지 않게 도착해

사과해야 할 한 사람에게 마음을 전했고

내 의도와 그의 오해를 천천히

교차시켰지

사과를 하고서 그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표정을 보고 있으니

왜 내 눈가가 뜨거워지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찢겨나간 내 손톱 자리가

둥그렇게 다듬어지는 느낌이지만

아직도 모르겠어, 사과는

빨리 해야 하는 것인지, 손톱은

늘 바짝 잘라두어야 하는 것인지

너무 짧아도 아프고, 길어도 아픈

변하는 자리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러나 한 번이라도 그의 눈동자

느린 물결을 미리 떠올려 보았다면

일상을 급히 추락시키는 일 없지 않았을까

서로를 지나가고 있는 지금 당신 얼굴

이제야 조금씩 눈에 들어와서

그림자 속 캄캄하게 줄었다

가장 낮은 자세로 길어지는 시간들

천천히 몰아야 하는 건

자동차만이 아니었지

십일월 나무들이 조용하게

노란 물방울처럼 녹고 있었어

​​

웹진 『시인광장』 2022년 12월호 발표

 


 

허민(許旻) 시인

1983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4년 웹진 《시인광장》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누군가을 위한 문장』(시산맥, 2022)​이 있음. 2022년 제2회 시산맥 창작지원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인천 동산고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