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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연숙 시인 / 사해(死海)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2.

김연숙 시인 / 사해(死海)

 

 

나의 가슴바닥은

지상에서 가장 낮은 곳

온갖 이야기 흘러들지만 유출구는 없어

기다려야 하네 시간의 투명한 감옥이네

 

나의 가슴 깊숙이

잠입(潛入)할 순 없다네

밀어내고 밀어내는 내 순결한 표면장력 위에

가만히 등 기대어 누워보게나

무등 태우며 안아주겠네

아무도 내게 와서

자살할 순 없다네

 

메마른 태양 볕에 졸이고 졸여

유황 짙은 한 사발 약이 되었네

어루만져 씻어주려네 지친 그대여

나의 외로움이 그대 온 몸

감싸주는 약이 되리니

 

모든 이야기들 땅 속으로 스며들어

조용조용 흘러드는 이 가슴바닥,

사막의 눈동자로 빛나고 있네

(푸른 불꽃 어른거리는 고밀도의

보석 한 알)

고요히 눈을 뜨고 기다리네

그대, 먼 길 걸어

내게로 오게

 

 


 

 

김연숙 시인 / 미완의 오벨리스크

 

 

불꽃나무 타오르는 나일의 동쪽 아스완

달아오른 화강암의 땅 채석장 터엔

미완의 오벨리스크 누워 있다

 

쏘아지지 않은 화살

깨어나지 않은 태양왕국의

너무 깊은 꿈

그 미끈한 옆구리를

한 발 한 발 걸어가 본다

치솟을 수 있는 정점까지

올라가 본다

41.7미터의 상향의지

--땅과 하늘을 통교하리라

 

낯선 제국의 광장 한가운데

볼모처럼 서있는 고왕국의 화살탑들

제국의 힘으로도 반출하지 못한

여기, 가장 거대한 백일몽

 

매운 꼭지점을 향해 힘 모으던

대지의 심장박동이

환영처럼 증발하는 이 한낮

 

낙하해도 좋다

잠든 네 위에 서성대며 기념촬영하는

이 삶의 관광객

우뚝 솟은 네 발치에 피꽃 튀는

한 그루, 불꽃되어 타고 싶다

 

일어서라, 장엄한 꿈의 증거

수천 년 누워만 있던 너의 직립을

이제 그만, 보고 싶다

 

 


 

김연숙 시인

1953년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同 대학원 졸업. 2002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 <눈부신 꽝> 『산수유 빛 그리움의 얼굴을 닦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