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자 시인 / 도넛*
동그라미 속의 동그라미, 부드럽고 달콤한 도넛이네. 고소해서 물리지 않는 도넛, 낮에만 잘 팔리는 도넛이네. 소문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 바게트 빵집 앞에 줄을 서네. 금고를 몇 개 더 사야겠어. 말로만 듣던 구름빵이야.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 아무리 뛰어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어, 이스트를 더 넣고 버터도 더 넣어야지. 질 나쁜 밀가루면 어때. 퇴근시간 맞추어 바구니마다 채워놓고 값을 올려야지.
안의 동그라미는 작아지고, 밖의 동그라미는 더 커져가는 밤. 외곽의 새 바게트 빵집들만 호황이야, 썰렁한 배꼽이 보이네. 속이 더부룩한 사람도 편안한 달콤한 크림이 흐르는데, 한입 베어 물 때의 뭉클한 감동이 앙꼬처럼 남아 있는데, 알 수 없어, 기어이 중심이 터져버렸어, 돌릴 수만 있다면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싶어. 알라딘의 램프라도 훔치고 싶어. 사십 인의 도둑이 되어 바위 문 열고 싶어. 들쥐들이 옆구리를 갉아 먹고 낮의 기억들로 북적되는 텅 빈 밤거리, 사람들이 떠나버린 중심은 접시 위에 덩그렇게 남아있는 딱딱한 도넛.
* 도심의 땅값이 오르고 생활환경이 나빠지면서, 도심의 인구가 감소하고 주변의 인구가 증가하여 인구 배치가 도넛 모양을 이루는 것을 도넛현상이라 한다.
천선자 시인 / 두루뭉수리 그녀
떼떼*는 앞뒤가 앞뒤가 없는 드럼통 악기를 가지고 있다. 늑대가 비비면 소리가 나는 드럼통 악기는 그녀의 몸에 착 달라붙어 있어, 악기를 가지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누에늙은이 실을 뽑아 천을 짜고, 주홍코 술도깨비 술을 빚고, 발탄강아지 짤짤거리며 돌아다닐 때, 그녀는 한쪽 귀문을 걸어 잠그고, 드럼통 악기 소리를 감상하는 것이 취미다. 선수 치는 천왕지팡이, 거위영장, 쌍코피 터지도록 비벼도 드럼통 악기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드럼통 악기 소리에 빠진 그녀는 귀머리장군코박이, 눈깔머리장군이 문쥐놀이, 고드래뽕 하자고 꼬드겨도 절레절레, 고개를 고개 넘어 절로 보낸다. 드럼통 악기가 궁금해 입방아를 찧어도 그녀의 대문은 열리지 않는다. 사방제기 하는 아이들의 까치발이 담을 넘어도 볼 수 없는 드럼통 악기, 그녀가 처진 눈꺼풀에 병뚜껑 끼우고, 처진 입꼬리 귀에 걸고, 드럼통 악기를 윤이 나도록 딲을 때, 팔팔한 장어를 장 속에 채운 멱부리늑대 한 마리가 달빛을 가리고 눈을 피해 개구멍으로 들어간다. 드럼통 악기를 이리 굴리면 쿵짝작, 저리 굴리면 쿵짝작, 굴리면 굴릴수록 쿵짝쿵짝, 비비면 비빌수록 쿵짝쿵짝, 물레방아 돌고 돈다. 드럼통 악기 소리에 살고 죽고 미친 그녀가 오무래미 입으로 오물오물 속삭인다. 오늘 밤 개구멍 열어 둘게요.
*떼떼 말더듬이.
- <시와사람> 2020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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