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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위상진 시인 / 귀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2.

위상진 시인 / 귀향

 

 

오랜 방랑 끝에

바랑을 내려놓는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밤

목탁이 바랑 속에서 울었다

 

탈진과 허기에 떨다가 그을린

희나리 둥치에 바람도 울었다

 

도시마다 병든 별이 등불켜고 나올 때

침묵하던 어둠이 말문을 열었다

더듬거리던 수식어가

모래바람 휘몰아간 가슴 위로

나부끼던 욕망과 무너지는 절망의

잣대는 눈금을 잃었다

 

세상 끝 빙벽을 돌아와

박제된 그림자로 방황하다가

바술라르의 촛불을 꿈꾸며

마주하는 거울 앞에

바람을 닮은 눈빛이 보였다

 

 


 

 

위상진 시인 / 잠시 자리 비우신

-문덕수 선생님께

 

 

프로이드의 중절모가 걸려 있고

흰 셔츠 접으신 채 돋보기로 책을 보시던

지성의 푸른 핏줄

펜 혹엔 늘 잉크가 묻어있었지요

시문학 4월호 ‘편집인 겸 주간 문덕수’

직함이 지워져 있더군요

찬란한 꽃 망사 위에*

철커덩 셔터 내려오는 소리

나침반 같은 말씀 어디서 들어야 합니까

 

‘먼저 가서 기다리세요’ 김시철 선생의 인사 말씀

흰 꽃잎은 뿌연 안경 너머 애도의 눈雪으로 날리고

죽음은 지상에 남겨진 자에게 구형求刑된

가장 긴 형기刑期임을 알고 계시지요

 

조셉 룰랭의 우편배달부 복장으로 갈아입으셨는지요

금장 단추 하나씩 채우고 모자는 살짝 삐딱하게

은빛 머리칼 반짝이는 거울을 보고 계시는지요

 

대학1학년 ‘교양 국어’ 시간 짙은 눈썹을 응시하던

저는, 시 공간 저 너머 ‘시문학‘에 편입생이 되었지요

시인의 복무를 짚어보는 지금

 

그런데 선생님

보낸 이 받는 이 없는 편지 말고 누에처럼 쓰신 손글씨

싸인해 주신 첫 장에 발딱발딱 살아 숨 쉬는 손글씨

받고 싶습니다, 문덕수체 손편지를요

 

사무실 책더미 속에 꽃을 물고 있을 만년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는*

꽃보다 환하게 웃으시던 어제 뵈온 듯

아무 일 없는 듯

잠시, 아주 잠깐

자리 비우신 의자 있다. 있다

 

*선에 관한 소묘.1.차용

*인연설에서 차용

*추모 시 ’영원한 우체부‘와 ‘잠시 자리 비우신’ 2편을 1편으로 재구성했다

 

 


 

위상진 시인

대구에서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1993년 월간 《시문학》에 <吉印堂> 외 5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햇살로 실뜨기』(시문학사, 2001), 『그믐달 마돈나』(지혜사랑, 2012)가 있음. 2007년 「푸른시학상」수상. 2016년 시문학상 수상.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재)심산문학진흥회 사무국장. 사)국제pen한국본부 기획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