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상진 시인 / 귀향
오랜 방랑 끝에 바랑을 내려놓는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밤 목탁이 바랑 속에서 울었다
탈진과 허기에 떨다가 그을린 희나리 둥치에 바람도 울었다
도시마다 병든 별이 등불켜고 나올 때 침묵하던 어둠이 말문을 열었다 더듬거리던 수식어가 모래바람 휘몰아간 가슴 위로 나부끼던 욕망과 무너지는 절망의 잣대는 눈금을 잃었다
세상 끝 빙벽을 돌아와 박제된 그림자로 방황하다가 바술라르의 촛불을 꿈꾸며 마주하는 거울 앞에 바람을 닮은 눈빛이 보였다
위상진 시인 / 잠시 자리 비우신 -문덕수 선생님께
프로이드의 중절모가 걸려 있고 흰 셔츠 접으신 채 돋보기로 책을 보시던 지성의 푸른 핏줄 펜 혹엔 늘 잉크가 묻어있었지요 시문학 4월호 ‘편집인 겸 주간 문덕수’ 직함이 지워져 있더군요 찬란한 꽃 망사 위에* 철커덩 셔터 내려오는 소리 나침반 같은 말씀 어디서 들어야 합니까
‘먼저 가서 기다리세요’ 김시철 선생의 인사 말씀 흰 꽃잎은 뿌연 안경 너머 애도의 눈雪으로 날리고 죽음은 지상에 남겨진 자에게 구형求刑된 가장 긴 형기刑期임을 알고 계시지요
조셉 룰랭의 우편배달부 복장으로 갈아입으셨는지요 금장 단추 하나씩 채우고 모자는 살짝 삐딱하게 은빛 머리칼 반짝이는 거울을 보고 계시는지요
대학1학년 ‘교양 국어’ 시간 짙은 눈썹을 응시하던 저는, 시 공간 저 너머 ‘시문학‘에 편입생이 되었지요 시인의 복무를 짚어보는 지금
그런데 선생님 보낸 이 받는 이 없는 편지 말고 누에처럼 쓰신 손글씨 싸인해 주신 첫 장에 발딱발딱 살아 숨 쉬는 손글씨 받고 싶습니다, 문덕수체 손편지를요
사무실 책더미 속에 꽃을 물고 있을 만년필 홀로 아지랑이 속의 들길을 꿈인 듯 날아가고 있는* 꽃보다 환하게 웃으시던 어제 뵈온 듯 아무 일 없는 듯 잠시, 아주 잠깐 자리 비우신 의자 있다. 있다
*선에 관한 소묘.1.차용 *인연설에서 차용 *추모 시 ’영원한 우체부‘와 ‘잠시 자리 비우신’ 2편을 1편으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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