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숙 시인 / 폭염 풍경이 느려졌다 인평중학교가 훤히 보이고 화진 빌라가 천천히 물러났다 객실 모니터엔 아마겟돈이 상영 중인데 안내방송이 잡음처럼 끼어든다 -폭염으로 인한 선로 과열로 서행하고 있습니다 도란거리던 남녀가 창밖을 내다본다 검푸른 수목 위로 불볕이 내리쬐는지 등 뜨거운 매미가 울어대는지 풍경에는 이렇다 할 징후가 없다 나란히 달리던 선로는 어디선가 헤어지고 객실 에어컨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SRT 336호는 발바닥이 뜨거운 고양이처럼 달궈진 레일 위를 살금살금 더듬는다 아마겟돈의 소행성은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는데 -폭염 아니고 폭음 아닐까? -숙취 덜 깬 레일이 침목을 베고 퍼져버린 거라고? 여자의 웃음소리가 자동문 소리에 잘려 나간다 객실 에어컨은 여전히 돌아가고 선로는 열풍에 더욱 비틀거리고 다음은 종착지인 수서역, 화면 속 브루스 윌리스가 마지막 인사를 한다 곧 폭파될 소행성에 그는 홀로 남아 충돌 직전의 지구를 구하기로 했다는데 기차도 멈춰 세울 저 폭양은 누가 막아주나 삼복염천인데 샌들 속 맨발이 자꾸 시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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