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원숙 시인 / 폭염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7.

이원숙 시인 / 폭염

풍경이 느려졌다

인평중학교가 훤히 보이고

화진 빌라가 천천히 물러났다

객실 모니터엔 아마겟돈이 상영 중인데

안내방송이 잡음처럼 끼어든다

-폭염으로 인한 선로 과열로 서행하고 있습니다

도란거리던 남녀가 창밖을 내다본다

검푸른 수목 위로 불볕이 내리쬐는지

등 뜨거운 매미가 울어대는지

풍경에는 이렇다 할 징후가 없다

나란히 달리던 선로는 어디선가 헤어지고

객실 에어컨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SRT 336호는 발바닥이 뜨거운 고양이처럼

달궈진 레일 위를 살금살금 더듬는다

아마겟돈의 소행성은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는데

-폭염 아니고 폭음 아닐까?

-숙취 덜 깬 레일이 침목을 베고 퍼져버린 거라고?

여자의 웃음소리가 자동문 소리에 잘려 나간다

객실 에어컨은 여전히 돌아가고

선로는 열풍에 더욱 비틀거리고

다음은 종착지인 수서역,

화면 속 브루스 윌리스가 마지막 인사를 한다

곧 폭파될 소행성에 그는 홀로 남아

충돌 직전의 지구를 구하기로 했다는데

기차도 멈춰 세울 저 폭양은

누가 막아주나

삼복염천인데

샌들 속 맨발이 자꾸 시려온다

 

 


 

이원숙 시인

울산 출생.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2016년 <미네르바>로 등단.